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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道

  
노자는 근 몇 년에 들어서는 동네북이나 된 듯하다.
유가에서는 곽점초간 노자를 근거로, 노자가 옛날에는 자신들과 친했다고 주장한다.
법가에서는 무슨 말이냐고, 마왕퇴 백서 노자를 근거로, 노자는 법가였다고 주장한다.
확실히 노자는 옛 부터 인기가 많았던 모양이다.
어떤 남자가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다고, 그 남자가 반드시 바람둥이인 법은 아니고,
노자 역시 유가나, 법가에게 관심을 받았다고, 반드시, 유가나 법가였다는 법은 아니다.
그리고 어떤 것의 정체성을 흔드는 문제제기를 할 때는 반드시, 치밀하고, 확실한 논거가 필요한 법이다.

이 책에서는 백서 노자, 그것도, 현행본과 시대적 차이가 별로 없는 한 고조 때 쓰여 진 [백서 을] 노자를 가지고, 전국시대 노자라면서, 장자와 대비하고자 한다.

여기서 잠깐 사실 확인을 하자면, 장주는 분명히 전국시대 사람임이 분명한데, 노자는 공자와 이러쿵, 저러쿵 한담이 있었다는 등의 기록이 전해져 오고, 현재 발견된 곽점 초간으로 보면, 춘추시대 그것도 공자의 선배일 가능성이 크다. 즉 장자와, 노자를 나란히 같은 시대에 올려놓는다는 것은, 춘추시대에 공자와 전국시대의 맹자가, 맞담배를 피는 격이라고 할 수 있다. 장자는 맹자 보다, 세살 아래 터울로 태어나서 희한하게 죽을 때도 삼년 뒤에 죽은 맹자와 동시대 사람이다. 때문에 초간을 연구했던 김충렬 교수 같은 분은 초간 노자는 확실히 사기에 언급된 최초의 노자일 수 있지만, 백서 노자의 경우는, 태사담이 썼을 것이라는 설을 조심스럽게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또 장자는 임어당이 장자의 각 장 마다 인용된 노자 구를 밝혀 그 전승이 노자에서 장자로 이어지는 것을 확실히 밝힌 바도 있다.

그런데 전국시대 노자, 즉 [백서 갑 노자]는, 또, 같이 발견된 [백서 을 노자]와 현격한 차이를 가지니, 대게 연구자들이 백서 갑, 을의 차이를 무시했던 것과 달리, 시대적 차이로 보면, 크게 동시대라 볼 수 있는 한 나라 초, 아버지 유방의 이름자인 邦을 피휘 한, [백서 을]과, 그 둘 째 아들인 문제의 이름 항恒을 피휘 한 [현행본]의 차이보다는 크다. 왜냐하면, [백서 갑]과 [백서 을] 사이에는 시황제의 분서갱유라는 문헌상으로는 그 시대적 간극을 뛰어넘을 수 없는 거대한 장벽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현재 대게 [백서 노자]라 알려져 있는 것은, 전국시대 노자인 백서 갑이 아니라, 보다 그 문자의 해독이 용이하고, 통행본과 유사한, 백서 을이다. 사실 한나라 이전, 즉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의 무수한 전서는 진시황이 총애한 법가를 제외하고는 후에 그 글자를 알아 볼 수 없을 만큼이나 대부분 전소되었고, 그 이후의 판본들은 대게 진본이 아니다.  

 

 

즉 이러한 사실 확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아마도 본 책에서 인용된 [백서 을 노자]는(이는 책에 수록된 내용에 비추어 판단했다, 참고로 필자는 취미삼아, 초간, 백서 노자를 모두 해독해 왕필, 하상공 본과 비교 연구하고 있다) 이미 법가적 변형을 겪은 노자 본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것이 無爲而無爲의 해석에서 비롯되었다는 것도 사실일 수 있다. 사실 백서 보다 50편이 적고(노자 본래 초간은 28수인데, 백서에서 31수로 나뉘어져 덕, 도경에 골고루 편장되었다), 2000여자에 그치는, 춘추시대, [초간 노자]는 무위자연이기 보다는 亡名자연에 가깝다.

  백서 노자는 큰 도가 기울고(大道廢), 밥상피고 인의가 있다(案有仁義)고 유가를 '위선'이라 본 만큼이나, 고대의 국가주의라 볼 수 있는 법가를 '위악'으로 비판했다.

초간에서는 亡爲가 道편에도 끼지 못하고, 행위의 도만을 뜻한,  {行人}(行 가운데 사람 人자가 끼워 넣어져 있는 글자로 '도 인'자라 한다)恒亡爲라 하여, "후왕이 지켜지는 것이나 그래도 만물은 마음 짓고, 마음 짓고도 하고자 함이 갑자기 잡히니, 이름 잃고 깨침을 가지는 것으로써, 점 보아진다"고 했던 것이니, "항구히 이름(분별?!)을 잃고, 종놈이고, 오직 계시를 전하는 여자(시녀?)일 뿐이라도, 천지가 감히 신하 삼길 떨치며, 후왕이 음전이 앉아 능히 사냥해지는 것이고, 만 가지 날림들은 장차 스스로(저절로) 집 안에 재물이라" 한 亡名의 道보다 한 수 아래로 언급된 것이다. 현행 본(왕필, 하상공 본)에서는 37장에 해당되는데, [백서 갑]은 이를 덕경, 다음에 도경이 오는 [백서]의 기술에서 도경의 가장 마지막에 놓긴 했지만, {行人}을 道라 고치고, 爲를 名으로 고치니 오직 道恒无名이라고만 하게 된다. 즉 노자에서는 초간이나, 백서 그것도 한 고조 본인 백서 을까지도, 道를 직접 無爲라 한 적이 없다. 오직 道恒無名만이 언급될 뿐이다. 이를 초간으로 돌려 名을 다시 爲로 고쳐, 道常無爲이라 하고도 而無不爲로 덧붙여, 도를 무위자연으로, 무소불위, 무불치지로 보게 한 것은 사실상, 한 문제 때 수립된 [도덕경]에 이르러서라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전국시대 노자가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다고는 할 수는 없으니,

 

서로 좋게 나가는 자는 애써 치운(거둔?!) 흔적조차 비우고,
(서로 좋게) 증언하는 자는 옥에 티 찾아지길 비우고, 
좋게 책(판결)하는 자는 나무 등걸(사형대)과 쪼개진 대나무(채벌) 탓이지 않다.
좋게 닫는 자는 거는 빗장과 자물쇠를 비워도 열어 통하지 못한다 함이고,
좋게 맺는 자는 (두 겹 검은 실) 묶기를 (비워도) 풀어 헤치지 못한다 함이다.
이 때문에 귀에 들리는 소리 사람은

마음 항구히 좋게 사람을 마음 책하거나 구해도 사람 내버리길 비우고,
물건은 질 좋은 재료 내버리길 비운다。
이는 마음 번쩍 하(끌려 익히?)는 밝음을 소화함이다.
원래부터 좋은 (사람이, 좋은 사람에) 스승인 것이면,
좋지 않는 사람은, 좋은 사람에 권해지는 재물인 것이라 함이다。
그 스승을 귀히 여기지 않고, 그 권해지는 재물을 아끼지 않으면,
오직 알 뿐이지 않나?! 크게 눈도 못 뜬 체。
이는 작아 보기 힘든 허리를 이해함이다。

(만약 백성이 항구히 또 죽길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어찌 어느 누가 처 죽이기로써 어리둥절해지는 것이라 함인가?!
만약 백성이 항구히 죽길 옳게 여기면,
곧 그래도 짓는(죽는?) 자는, 이 몸이 장차(마땅히) 얻고도 처 죽이는 것이니,
저 누가 감행함이 아닌가?!
만약 백성이 (항구히 또) 반드시 죽길 두려워한다면,
곧 항구히 처 죽이길 맡는 자를 잡고 있다.
저가, 처 죽이길 맡는 자 처 죽이길 창으로 친다면,
이는 대목에 제기(祭器) 깎길 침이 야!
저가, 대목에 제기 깎길 창으로 치는 자면, 곧 그 손 다치기가 커짐이 아닌가?

체형, 체벌과 단속이, 뭔가 닫아걸고 맺어 지킬 수 없다고 했고, 죄인을 함부로 버리지 말라고도 했으며, 심지어 아래 구의 ‘대목’을 칼을 잘 쓰는 망나니가 아니라, 사람의 명을 주관하는 천지라 보면, 사형 제도를 반대했다고도 볼 수 있다.
또한, 정치적으로 국가나 왕을 논하고 국가와 왕의 안위를 말했지만, 병기를 멀리하고, 전쟁을 싫어하고, 그 살핌이 날카로운, 병영 국가를 말한 것이 아니라, 국가를 팽창하여 크게 하지 않고, 작게 하고, 백성을 과부처럼 홀로 두어, 수많은 인재들이 쓰이길 마다 게 한다 했던 것이고, 분배를 적절하게 하고, 백성의 불만이 없게 한다고 했다. 왜 이것을 국가주의라 해야 할까? 국가주의는 사전적 의미로 국가의 안위를 위해 백성의 이익을 미루는 것이라 하는데, 노자가, 국가주의라는 오명을 받는 사실들은, 백성의 이익에 배치되거나, 그 이익이 보류되는 것이 아니다. 적과 나의 공통된 이익은 전혀 없는가? 만일 공통의 이해가 있어, 나의 이익이 되지만, 적의 이익이 된다면, 그것을 무조건 적의 이익으로만 돌려야 할 것인가?

노자에 국가주의라는 딱지를 붙여놓고, 국가와 왕실이 안위를 위해, 그렇지만, 백성의 안위를 구하고, 그렇지만, 분배의 정의를 구하고, 그렇지만, 나라를 작게 하고, 그렇지만, 병기와 전쟁을 멀리한다는 토를 달아서, 그래서 국가주의가 아닌 듯도 보이지만, 그래서 ‘그게 교묘한 국가주의라는 거야’라는 주장을 한다면, 이는 어디서 많이 봤던 장면이 된다. [범죄의 재구성]에서, 곽한구는 무엇을 하던 언제나 범인이었고, 노자는 뭐라고 했던 국가주의자임이 확실치 않은가?! 호랑의 다리를 분지르고, 이빨과, 발톱을 빼내고도 이를 맹수로 두려워한다면, 과연 무엇이 두렵지 않을까?

이를 테면, 본문에서는, 노자는 왕이 스스로는 고아, 과부, 나쁜 놈이라 부른다고, 그 귀하면서도 천한 척하여 귀함을 유지코자 한다고, 즉 왕의 입장에서, 귀함을 보전하는 방법을 말했으나, 천한 백성의 입장에서 귀할 수 있는 방법을 논하지 않았다고 노자를 비판했다. 그러나, 왕, 신하, 백성의 위계질서가 하늘이 준 준엄한 신분 질서로 여겨졌을 당시에, 그 귀한 왕이 명칭이라도 낮추어 백성 중에도 가장 외롭고, 천한 사람들과 동등이 한 사상의 파격은 읽지 못한다. 이는 오직 왕의 이익일 뿐인가?!

당대나 지금이나, 백성이 진정 원하는 것이 과연, 모두 왕처럼 귀하게 되어, 제비집이나, 곰발바닥을 먹는 것일까?   

차이란 오직 상대적일 뿐이다. 노자, 장자를 묶어 법가와 비교한다면, 노자나 장자는 법가가 아니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노자와 장자를 비교하여, 장자가 단지 정치적 관심이 없고, 왕이나 국가에 대해 크게 언급하지 않았다(그러나 포정의 비유에는 왕이 등장한다)고, 국가주의가 아니고, 노자는 정치적 관심이 지대하고 왕이나 국가의 안위에 관심을 두었다고 국가주의라 보아야 할까? 문제는, 노자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장자에 비한 노자의 국가주의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노자는 국가주의인가 보다고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본문은 이러한 오해를 피하지 않았으니, 장자와 노자는 심지어 서로 다른 도를 말했고, 서로 대치된다고 까지 한다. 왜 저자는 먼저 장자, 노자가 유가나 법과와 논하는 패널을 생각지 못했을까?  황소개구리는 뱀을 먹고 사마귀는 벌레를 잡아먹는 포식자이지만, 일반적인 우리의 관념은, 개구리나 사마귀를 '맹수'의 범주에 분류하고 있지 않다. 노자를 국가주의자라 하는 것은 어찌 보면 개구리나 사마귀를 맹수라 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한 혐의가 있을 수는 있지만, 기소 내용이 너무 과장돼 있으니, 배심원은 오히려 피고에게 면죄부를 주고 싶다.

노자는 몇 자 안 되서 열심히 공부해 보지만, 장자는 아무리 비유라지만, 너무나 글자 수가 많아서 차마 열어 볼 꿈도 못 꾸는 무식한 아줌마가 생각하기에는 이 책을 읽고서는 노자도 모르겠고, 장자도 모르겠고 그리고 도대체 그렇게 무서운 '국가주의'가 뭔지도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道에서 만물이 생했다(道生一, 二生三, 三生萬物)는 문장은 백서 갑은 유실된데다가, 앞 뒤 문맥에도 맞지 않고, 어색하여, 정말 전국시대 노자가 그렇게 말했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을 덧붙인다. 이는 백서 을이나 통행본에서 덧붙였던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초간은 '萬勿作焉而弗{牙心}이라, 성인은 만 가지 날림들이 일어나도 맞물리는 마음을 떨친다'고 했던 것이다. 

하나 더, 노자에서 대표적인 권모술수인, 백서 노자 80번째(통36)에 해석에 관한 의문이다. 즉 현재 통행본은  將欲?[?]之, 必固張之라 되어, 장차 움츠러들어지는 것이고자 하면, 반드시 단단히 펼쳐지는 것이라 되어 있는데, 백서 갑은, 將欲拾之, 必古張之라, 본래는 옛 고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만일 백서 갑이 古를 ‘옛날에'라는 뜻으로 썼다면, 이는 통행본과 같은 권모술수의 뜻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무리 술수에 능해도, 장래, 어떤 사건을 일으키기 위해,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인 옛날을 바꿀 수가 없기 때문이다. 즉 이는 欲이 날씨의 변화와 같은 가까운 미래의 달라진 상황을 뜻했던 것처럼(대사전 참조), 단순히, 장차, 주워 모아 질 것은, 반드시 옛날에 널리 펼쳐졌던 것이고, ...중략... 장차 빼앗겨 지는 것이라면, 반드시 옛날에 주어졌던 것이란 뜻으로, 만물의 전변과, 사건의 반전을 의미한 것일 수 있다. 이것이 본 책에서,' 빼앗으려고 한다면, 반드시 먼저(先?) 주어야한 한다'고, 본문의 '옛 고古'가, '먼저 전先'으로 보아져, 노자가 백성을 수탈키 위해 반드시 먼저 주어야 한다고 했다는 실상이다. 이렇게 본래 말하지 않았던 뜻을 확장해서, 그 의미를 확대해간다면, 누구든지,원하는 데로 보고, 사상누각을 지을 수 있다.

 

 사실 [노자]는 1차 자료인, 초간이나 백서도 오직 중국의 판독에 의지할 뿐, 우리 스스로는 아직, 완독, 완역을  마친 바 없다. 그러나, 그에 대한 해석은 참 성급한 듯 하다. 성급한 해석이라 해도, 왜 직접 검토한 원문 해석이 아니라, 오직 남의 풀이에만 의지하려 하는 걸까?  남의 원문 풀이에 의지하더라도 왜 도무지 비판적 검토는 없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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