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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道

저자는 백서 노자를 옮긴 이다. 국내에서는 유일하고 가장 믿을만 하다 할 수 있다.

초간 노자와, 백서 노자를 연구하는 사람으로써, 백서 노자는 중요한 텍스트의 하나다.

그러나 책 [백서 노자]는 백서와 통행본, 그리고 초간과 백서의 차이가 부분적으로나마 기술된  반면, 백서 갑, 을의 차이는 거의  보지 못했다.

그런데 백서 갑은 통일전 중국 즉 시황제 이전인 전국 말기에 쓰여진 반면, 백서 을은, 한 고조때 이를 옮겨, 역시 한나라 때, 그의 둘째 아들인 문제에 의해 정리된 통행본에 더 가까울 수 있다. 마왕퇴 한묘에 귀부인이 묻힌 시기는 한나라 문제때라 하고, 이는 백서 을과 통행본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하겠다.  이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암시하는데, 즉 초간, 백서 갑으로의 원본 노자가, 황로적, 법가적 변형을 거쳐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띈 것은 한나라 고조와, 문제의 업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가차'자라는 도대체 고문 연구자라면, 있을 수 없는 '가정'에 갇혀, 백서 갑, 초간으로 진행되지 못하고 막히게  된다.

가차란, 고대에는 어떤 개념이나 생각을 표현할 글자가 없어서, 쓰고 있던, 다른 글자를 빌어 쓴다는 것이다. 사실 한자는 어떤 사물의 형상이나 혹은 사건의 사황을 빌어 뜻을 나타낸 것으로 그 사물과, 사건에 연상되는 뜻을 확대해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뜻의 확산은 그 사물이나, 사건에 제한된 것일 뿐, 이를 무한히 확대해 갈 수는 없다. 때문에, 새로운 글자들이 조형되고, 새로운 개념, 생각이 전달 된다. 게다가 부정사로 보면, 초간과 백서는 통행본 보다 더 다양한 글자를 쓰고, 초간, 백서의 원문을 살펴 보면, 즉 고증해 보면, '가차'라자기 보다는 새롭게 조형된 글자일 가능성이 더 크다. 이를 테면, 가차로 쓴 글자중에는 지금은 볼 수 없는 글자들이고, 만일 글자가 없어 가차자를 쓴다면, 당시에도 많이 쓰던 글자 중에 하나이고, 지금도 볼 수 있는 글자 중에 하나일 뿐일 텐데, 초간, 백서 갑에서 학자들에 의해 현행 통행본 무슨 글자의 '가차자'라 칭해진 많은 글자들은 지금 그 연원도 알 수 없고, 전혀 쓰이지 않은 글자일 경우가 많다. 즉 僞를 가차하려면, 爲나 作을 쓸 수 있지만, 爲아래 心을 깐 다른 글자를 쓰지 않는다. 이러한 글자는 현대에 없고, 과거에도 초간과 백서 갑만 보일 뿐이다. 만일 이런식으로 가차자라 보려면, 겨우 한획 차이인 主를 王의 가차자라 하거나, 王을 主의 가차자로 봐야 한다. 오히려 '가차자'란, 분서갱유 이후, 춘구전국시대, 다양한 사상 개념을 파 묻은 진한시대 이후 후학들이 이제 고대의 문서를 보더라도, 그 쓰임이 사라져 그 뜻을 알 수 없어, 당대에 쓰고 있는 글자로 음을 빌거나 뜻을 빌기위해 쓰였다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심지어는 위작을 위해 썼을 수도 있었다.  이를 테면, 백서 을의 짐朕은 승勝의 원자로, 勝의 가차라고도 볼 수 있지만, 정작 짐勝이라 한 것은 전시대의 것인 백서 갑이고, 짐朕이라 한 것은 후서인 백서 을이다. 백서을은  이 밖에도 聖을 금문 초국체 꼴인, 耳口라 했고, 이웃 隣 역시 금문체로 썼는데, 정작 이 보다 전시대의 것인 초간은 聖이라 했고, 隣 역시 초간은 금문체로 썼지만, 백서 갑은 전서체로, 지금과 같은 형태의 隣을 썼다. 이는 백서 을이 초간, 백서 갑을 변형했으면서도, 보다 고본임을 가장한 위서일 가능성을 보여주는 일례일 뿐이다. 초간에 仁을 가차해 썼을 것이라 추정되는 {身心 }자의 경우도, 이는 당대에 仁자가 없었다는 뜻이 아니다.  仁은 尸二, 혹은  人二꼴로 갑골문 부터 쓰였던 글자고, 아마도 이는 피휘법과 관계된 것이고, 인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반영해 당대에 쓰였지만, 지금은 사라진 글자 일 수 있다. 글자 수가 계속 증가하였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과거의 글자들이 없어지지 않고, 늘어나기만 했다는 것은 상식에도 어긋난다.  

사실 모든 글자들을 이렇게 고증해 나가고, 새로운 뜻, 글자들을 새겨나간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마치 켜켜로 쌓인 먼지를 조심스럽게 가는 붓으로 털면서 고대 유물을 발굴해 나가는 것처럼. 그러나, 본래 있던 관념 사상에서, 먼지와 때처럼 쌓여간 후대의 변화를 털어내지 못한다면 2000여년의 시간차는 전혀 극복되지 못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가차'라는 미명아래, 현대에 알려진 글자로 과거의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글자를 덮어간 현대 학자들의 위업(?)은 21세기의 분서갱유라 할만하다.

그런데 왜 그러한 분서갱유가 문제가 되는가? 분서갱유가 꼭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분서갱유 덕분에, 많은 유가서들은 청대의 고증을 통해, 새롭게 알려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히려 분서갱유를 피했을 것이라 여겨지는 노자는 위작이 진행되었어도 이처럼 아무도 의심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의심치 않은 가운데,

노자의 본래 모습은 이렇게 덮어질 것인가?

 

노자는 초간에서는, 氣자를 쓰지 않았고,  皀次아래 火를 깐 꼴로 초간16편(통55장)서 단 한번, "心{卜曰又}{皀次火}曰{侃力}. 勿{爿戜}則老, 是胃不道.라,  "마음이 낟알 이어진 열기(기운)에 계시를 전함을 ‘강직한 힘이(억지)’라 일컫는다. (부정한) 날림이 길게 날카로울 때는 쇠해지고, 이는 道이지 않기를 소화함이다."고 했을 뿐이고, 이는 양생론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이었을 보여줄 뿐이다. 이는 장자도 같은 경향을 보였던 것이다. 백서 갑에서도, 초간에서 인용된 구절을 제외하고는 이상하게도  槫氣至柔 라 하는, 명백의 기의 운용과 관련된 구절이, 유실되었고, 백서 갑에 나오는 글자는, 하나, 中氣以爲和라는 구절 뿐인데, 이 조차 백서 갑은 中이라 해서 沖기이위화라 한 통행본과 다르다.  

또 무위치지에 관해서라면, 초간과 백서 갑이 다르고, 백서 갑과 또 백서 을, 통행본이 다르다. 즉 초간의 행위의 도를 {彳亻亍}의 꼴로 따로 언급하고, {彳亻亍}亙亡爲也. 侯王能守之, 而萬勿{爿酉}(將)自{爲心}. 사람이 사거리 가운데, (치우치지 않고) 가운데서 나아가는 길, 즉 행위의 도는 영원히 짓기를(함, 행위를?) 잃었다 함이다. 변경의 작은 나라 왕이 능히 지켜지는 것이나, 그래도 만 가지 날림들은 장차 스스로(저절로) 마음 짓는다고,  道亙亡名, 僕, 唯{卜曰女}, 天{陀土}(地?)弗敢臣。 侯王女能獸之, 萬勿{爿酉}(將)自{宀貝} 道는 항구히 이름(분별?!)을 잃었고, 종놈이고, 오직 계시를 받는 여자일 뿐이라도, 하늘과 비탈져 무너진 흙 땅인 천지가 감히 신하 삼길 떨친다. 변경의 작은 나라 왕이 음전이 앉아 능히 사냥해지는 것이고, 만 가지 날림들은 장차 스스로(저절로) 집 안에 재물이다고, 망명의 도에 비해 낮고, 無弗爲라 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이것이 백서 마지막 편에 인용되어, {彳亻亍}자가 없어지고, 망위가 망명이 된 것은, 아마도, 이를 無爲之致로 보고자 한 백서 갑의 의도일 수 있으나, 적어도 초간의 뜻은 아니었다. 즉 백서갑은 노자를 통치술로 해석 이해한 최초의 버전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곧 법가와 결합한, 황로학일까?   

이 모두 '가차자'라는 학자들의 가설을 풀어야 살필 수 있는 것이고, 그 가차자에서 막힌 저자의 행보가, 백서 을과 가상 유사한 하상공 주의 번역에서, 회남자로 이어진 점은 대단히 흥미롭다 하겠다. 

노자는 과연 황로학이나 양생론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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