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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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정님의 서재
  • 여자의 독서
  • 김진애
  • 14,400원 (10%800)
  • 2017-07-10
  • : 2,427
책 읽는 여자는 힘이 세다고 한다.
오랜 세월 동안 여자가 많이 아는 것은 좋은 게 아니었다. 여자는 조신하게 남편 만나 결혼해서 아이 낳고 살면 되는 것이지 글을 읽고 시를 쓰고 사군자를 치고 투표권을 행사할 권리 따위는 없었다. 심지어 마라톤을 뛸 수도 없었다. (뛰면 자궁이 떨어질 수도 있다는 이유가 그 당시 남자들이 내세운 이유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자들은 제지 당해왔다. 그것이 여성들에게는 불과 백 년 전까지도 적용되는 논리였다. 어쩌면 지금까지도. 똑똑한 여자들은 마녀사냥을 당하고 히파티아처럼 맞아 죽기도 하고 허난설헌처럼 평생을 괴롭게 살아가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그 모습을 어디선가 본 듯했다. 조선시대에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반포할 때 많은 선비들과 유학자들이 반대한 이유. 백성들이 글을 알고 똑똑해지면 자신들이 마음대로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지식은 그들의 특권이었다. 그것이 남성이든 권력자이든. 그래서 책을 읽는 여자는 힘이 센 것이다.

차이와 차별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은 조심스럽다. 어느 한 쪽에 치우쳐서는 안 되지만 치우쳤기에 차이와 차별이 발생한다. 나는 당연히 한 쪽의 입장을 가지고 있고 그렇다면 그 쪽에 더 치우쳐서 생각할 게 분명하기 때문에 편파적인 시선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해서 조심스럽다. 그럼에도 이런 책이 필요한 것은 분명히 존재하는 그 차별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많은 사람들이 인식해야 한다는 필요성은 필히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의 시작부터 꽤 공감을 하고 있었다. 솔직히 여자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우리 집은 딸 둘에 아들 하나인 집인데 어릴 때부터 남아선호사상을 대놓고는 아니더라도 겪어본 사람으로서 여성이 여성이기 때문에 받는 차별은 분명히 존재함을 안다.
꼭 남동생과의 차별이 아니더라도 맏이와 둘째간의 차별도 겪어봤다.
예를 들면 어릴 때 언니와 내가 옷장 서랍을 같이 쓰고 있었다. 위 아래로 나뉘어져 있는데 내가 위 서랍을 하고 싶어서 한 건지 아닌지는 기억이 안난다. 어쨌든 내가 위, 언니가 아래 서랍을 쓰고 있었는데 외할머니가 맏이가 위의 서랍을 써야 한다고 해서 졸지에 나는 아래 서랍을 쓰게 되었다. 아래 서랍을 써서 서운한 게 아니라 그렇게 해야하는 이유가 타당하지 못해서 서운했다. 어린 나의 마음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고 그게 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인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다.

물론 아들만 제사 지내러 다니고 하는 건 좋다. 가기 싫은데 굳이 안 가도 되니까.
근데 친가에 가면 싫은 게 여자에게 집안일을 다 시킨다. 그러고서는 남자들은 절하고 밥먹고 땡이다.
나는 그게 어릴 때부터 너무 싫었다. 그래서 가만히 있으면 작은아빠가 나보고 행주를 쥐어주고는 상이라도 닦으라고 시킨다. 그럴 시간에 자기가 하면 되지 왜 굳이 나한테 시키는지 모르겠다.
할머니는 알아주는 남아선호사상으로 손자들을 유독 예뻐했고 큰아들의 손녀, 손자는 더욱 아꼈다. 내 동생은 그 와중에 아들인데도 둘째 아들의 아들이라 그런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근데 또 작은아빠의 외동아들은 엄청 아낀다. 나름의 법칙이 있나보다. 그래서 언니와 나는 할머니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것은 집에서도 이어져 아빠는 집안일은 절대 안하고 엄마가 다한다. 그나마 언니랑 내가 좀 도와주고 동생은 시키면 하기라도 한다.

유학 경전 어디에 남자는 집안일 하면 안되고 여자만 집안일 해야 된다고 써놨는지 찾아보고 싶어진다.
어쨌든 여자의 차별에 대해 공감하는 이야기를 하다가 길어졌는데 그래서 나는 유교를 정말 싫어한다.
조선을 망친 것도 거기에 있거니와 사회에 만연한 차별의 뿌리가 거기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별 시답잖은 체면치레에 빠져서 이상이나 꿈꾸고 하니 현실에서 망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책 이야기를 해보자면 작가는 황진이를 좋아한다고 밝히는데 이유는 나와 다르지만 거기서 마음에 들었다.
나는 드라마 황진이를 통해서 황진이라는 인물의 매력을 상상하고 좋아했던 것이지만 작가는 황진이의 역사적, 문화적 다양한 매력을 알아보고 좋아하는 것 같았다. 어쨌든 좋아한다는 건 같으니 괜히 동질감이 생겼다.

이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여성 인물들에 대해서 아는 인물들도 있고 또 읽은 책도 있었다.
읽은 책이나 아는 인물들이 나오면 반가워서 열심히 읽다가 모르는 사람들이 갑자기 나오면 살짝 김이 빠지기도 했다. 아는 척하고 싶었는데 모르는 사람들이 나와서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는 은근한 작가의 자랑도 느껴졌다. 책을 읽는 여성으로서, 지식인 여성으로서의 자랑이 곳곳에서 나는 느껴졌다. 나쁜 게 아니니 칭찬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잘나면 자랑하는 거지 뭐.

작가가 소개하는 인물들 중 가장 이끌렸던 여성 인물은 박경리와 박완서다. 나는 사실 둘의 얼굴을 바꿔서 알고 있었다. 박경리는 요새 방영되는 알쓸신잡을 통해 더 알게 되었는데 방송에서도 소개된 토지라는 책을 이 책에서도 소개하고 있다. 어마어마한 양과 수십년에 걸쳐 진행되는 이야기로 도저히 읽을 엄두가 나지 않는 책이었다. 그럼에도 박경리라는 사람에 대해 저자가 가진 생각들을 따라 읽으면서 나 또한 박경리를 존경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아직은 그 어마무시한 책을 읽을 엄두는 나지 않으니 수박 겉핥기 식으로 좋아하는 수밖에.

박완서의 경우는 인상이 너무도 좋아서 그 사람이 쓰는 책을 읽어보고 싶게 만들었다. 사실 고등학교 때 필독서로 <나목>이라는 책을 사서 읽은 적이 있는데 너무 재미 없어서 대충 읽었던 기억이 있다. 아직은 내가 그런 책에는 흥미를 못 느끼나보다. 나중에 세상을 더 겪고 나서, 아니면 굳이 그런 때가 아니더라도 인생에서 운명의 책으로 만날 수 있는 순간이 있지 않을까? 그런 날을 기다려본다. 유명한 책이라 꼭 읽어보고 싶은 게 아니라 나는 이 작가를 알아가고 싶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끄덕여지는 부분들이 많았다. 여자들은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하나보다. 나는 나만 그런 줄 알았다. 나도 사실은 엄마처럼 살지 않아야지 하는 생각을 하고 아빠에 대해 부조리하다고 느낀 적이 셀 수 없이 많으며 그럴 때마다 내 안에서 반항 정신이 커진다. 그런데 박경리도 그랬고 작가도 그랬다니 역시 사람 사는 건 다 똑같은가보다.

이 책의 말미에서 제시하는 것이 바로 인생의 진리다.
양성적인 것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여성이어도 안에 남성성을 가지고 있을 수 있고 남성이어도 안에 여성성을 가질 수 있다.
나는 감히 보편화해서 모두가 그렇다고 생각한다. 정도의 차이일 뿐.
예전엔 몰랐지만, 혹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알 수 있고 모두가 동의할 수 있다.
그런 시대에 살면서 우리는 아직도 암암리에 차별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우스워졌다.
어차피 모두가 두 개를 가지고 있으면 외양으로 차별하는 것은 자신의 내면을 부정하는 것일수도 있다는 소리가 될테니 말이다.

요즘 내가 느끼는 건 국민성이 향상되어서 정치를 대할 때도 어떤 흑색선전, 네거티브에 속지 않고 자신이 이제껏 가진 소신에 따라, 그리고 모두가 인정하는 보편적 진리에 따라 대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더욱 발전되어서 사회 전반에 아직까지 남아있는 차별(여성 뿐 아니라 남성도)에 대해서 다르게 사고하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나또한 기꺼이 그렇게 할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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