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는 ‘플롯’을 통해 개별 사건들에 필연적인 인과성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 후에 어찌되었는가?’ 라는 끊임없는 질문(혹은 호기심)을 야기하고 그것을 빈틈없이 매끄럽게 매우는 ‘플롯’이 곧 이야기의 힘이라 할 것인데, 이러한 소설읽기와 소설쓰기에 대해 작가는 맨얼굴을 내밀고 “(이봐, 친구. 자네는 어떤가? 자네는 지금 이 부분을 어떻게 읽고 있나?)”라고 질문하는 것이다. 여기서 독자는 멈칫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왜’라는 식으로 소설(“플롯”)을 읽어온 경우라면 그것은 ‘요원’들의 입장과 다르지 않는 것임을 확인시키는 문장 앞에서 독자는 놀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가는 ‘국가보안법’의 ‘창작력’을 대변하는 정보과장 정남운을 대학시절 문학 서클에 가입해 여러 편의 소설을 창작했으며 데미안을 100번 넘게 읽어 어떤 문장들은 줄줄 외우는 사람으로 설정해 놓았다. 이는 ‘법’의 세계와 소설의 세계가 공모하고 있는 ‘플롯’이 어쩌면 ‘타인의 고통’을 제거하거나 ‘감상’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를 소설가적 자문을 위한 설정이라고 하겠다. 나복만이 고문을 당하는 장면을 서술한 뒤에 이어지는 문장들은 작가 자신 또한 ‘플롯’이 아닌 ‘고통’에 공감하게 된 장면이라 하겠다. “말하기 어렵고, 쓰기 힘든”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였기에, 스토리도 플롯도 정지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작품을 통해 이기호는 타인의 고통과 ‘소설’에 대한 사유를 시작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이전까지의 ‘플롯’은 ‘타인의 고통’은 ‘발뒤꿈치 상처’로 간주했다. 다시 말해 나복만의 “고통은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우리가 문장으로 기록할 수 있는, 나복만의 고통”이었던 바, 그것은 “왼발 오른발, 각각 가로 21센티미터, 세로 11센티미터 정도”(239면)라는 수치로 공감하는 체 했던 것이다. 작가도 작품의 이 대목 즈음에서 고통의 ‘비명’ 소리가 열어젖힌 적막과 침묵의 공간에 처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 공간에 대한 사유는 진행형이기 때문에, 이 작품은 ‘차남들’을 호명하는 데 국한되었을 것이다. ‘차남들’을 굳이 젠더의 문제로 읽을 필요는 없지만 작품 속의 김순희의 삶이 나복만과 다른 남성 인물들에 비해 적극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은 것을 이유로, 향후에 창작될 작품에서는 ‘장녀’ 혹은 ‘차녀들의 세계사’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