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1920년대 세계 곳곳을 다녀온 조선인들의 기록들을 엮은 것이다. 긴 역사 속에서 본다면 그다지 오래전도 아니지만, 그 시절에 대해 배운 것도 아는 것도 별로 없는 내게는 아득히 먼 시대처럼 느껴진다. 국사 시간에 비교적 꼼꼼히 배웠던 조선시대가 오히려 더 가깝게 느껴질 정도이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전후사에 대해 (요즈음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우리 때에는 정말 허술하게 배우고 넘어갔던 것 같다. 그래서 최근에는 조금 가볍게 당시의 시대를 보여주는 책들에 가끔 찾아 읽곤 한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당시 여러 이유로 세계를 다녀온 이들, 여섯 명이 쓴 것으로 당시 신문이나 잡지에 실렸던 것들이다. 제목 속의 이상은 이 책에 글이 실린 작가의 이름 李箱이면서 동시에 이상적인 삶을 의미하는 理想, 이렇게 중의적인 의미로 쓰인 것이라고 한다.
현재의 시각에서 보자면, 그렇게나 느린 교통수단과 빈약한 정보를 가지고 어떻게 세계 곳곳으로 떠났을지, 감히 짐작조차 하기 힘들다. 하지만 걸어서만 다니던 근대 이전을 생각한다면 철도와 연락선은 근대를 상징하는 대단한 속도였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들의 대담한 여정을 쫓으며 책을 읽다보면 '속도' 따위는 중요하지 않게 느껴진다. 무엇을, 어떻게 행하고 느꼈는지가 훨씬 중요하게 읽히기 때문이다. 더불어 '~하더이다'와 같은 표현처럼 예스러운 어투들이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작가들의 면면을 보면 이광수, 이상과 같이 잘 알려진 이들도 있었지만, 최초의 변호사이자 독립운동가도 활동했지만 북한으로 넘어갔기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허헌, 납북된 독립운동가 박승철 같은 이들도 있었고, '교사'라는 짧은 소개만이 붙어있는 이도 있었다. 서로가 다른 이유로, 조금씩 다른 장소에 다녀온 이들은 당연히 조금씩 다른 스타일로, 나름의 시각을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는 것도 흥미로웠다.
책을 읽으면서 사진기 없이 다니는 여행, 당시로서는 너무나도 낯설고 새로웠을 풍경들을 온전히 말로 풀어썼던 여행에 대해 상상해 보았다.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를 보고, 이전에 알고있는 단어들만으로 묘사하는 일이야말로 창의력과 상상력을 총동원해야 하는 일이 아닐까.
... 그를 가옥의 대삼림 지대라고나 설명할까, 그 외에 다른 해설의 말을 나는 못찾겠고 ... 자동차가 까만 박개미 떼같이 늘어선 것과 해륙에서 울리는 쇠망치, 기적소리 등 동원령이 내린 전쟁지대가 아니면 상상도 못하리만치 복잡, 다단한 폼이 졸한 내 붓끝으로는 그려낼 재주가 없는 것을...
허헌은 샌프란시스코 시가를 소개하면서 이처럼 쓰고 있다. 제법 훌륭하지만 본인은 보이는 것을 더 잘 표현할 수 없는 점이 조금쯤 답답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몇몇 글들에서 공통적으로 다뤄지는 소재나 감상들도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연락선이 출발하는 곳의 풍경에 대한 것이다. 환송하는 사람들로 가득 들어차고, 눈물로 이별을 고하는 이들의 모습 등등이 묘사되고 있었다. 당시로서는 그렇게 먼 길을 떠나는 일이 드물었고, 아픈 사연을 안고 떠나는 경우도 많았을테니 당연한 일이었을 것 같다. 또 한가지로는 중국인들을 가여이 여기는 시각이었다.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과 모욕 속에서 비참하게 생활하던 중국인들의 모습이 많이 언급되어지고 있었다.
... 매우 속이 불편하였다. 그네가 왜 그리도 염치를 잃었는가. 그네가 요순과 공맹을 가지고 ... 5천년의 문화를 지닌 국민이 아닌가. 그가 어찌하여 손해를 천성보담 더 두려워하게 되고 내 집에 기류하는 자에게 도로 수모를 달게 여기게 되었나.
이광수의 중국 체재기 중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었던 글은 교사 성관호가 일본에 다녀와서 쓴, 길지않은 글이었다. 당시 그가 일본에 가서 보고 듣고 느낀 점을 기록한 글들은 예사롭지 않은 예리하고도 정확한 시각으로, 우리가 그들의 어떤 점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지, 또 어떤 점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지를 싣고 있었다.
그들의 민족성의 단기협에는 대외적으로는 여러 가지의 반감을 매하는 해악됨이 불무하나 대내적으로는 잠점 되는 것이 불무하니 즉 자국을 위하는 모든 일에는 일시의 희생을 불구하고 능히 공동일치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네가 모든 인류와 협동하여 세계적으로 나아갈만한 성과 덕을 가지지 못한 것은 물론이나 자국 자민족의 보호에는 능히 감내할 것이다.
그의 일본 체류기 뒤쪽에 나오는 이 글은 지금의 일본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해설이나 설명을 통해 한 시대를 배우는 일도 필요하지만, 이렇게 그 시대를 담고있는 텍스트를 직접 읽으며 스스로 여러가지를 궁리해나가는 일도 좋은 역사공부인 것 같다. 책을 읽어나가며 그 시대의 인물들과 간접적이나마 교감을 나누는 느낌, 그들과 조금쯤이나마 더 가까워진 느낌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