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올가 토카르추크? 누구라고? 나만 처음 들어보는걸까? 일단 읽어봐야겠다! 곧바로 장바구니에 담긴 책은 <태고의 시간들>이었다. <방랑자들>이 맨부커상을 수상했다고 하는데, 왠지 제목이 더 끌리는 <태고의 시간들>을 먼저 읽고 싶었다.
이름의 발성조차 낯설게 들리는 올가 토카르추크는 폰란드 작가로 심리학과 문화인류학, 철학을 공부했고 '신화와 전설, 外典, 비망록 등을 차용해 인간의 실존적 고독, 소통의 부제, 이율배반적인 욕망 등을' 포착한다고 (책날개에) 소개되어 있다. 소설을 읽다보면 이 소개글이 매우 적확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소설의 내용이 바로 이런 것들이기 때문이다. 신화 전설, 외전, 실존...
폴란드의 한 신화적인 마을 '태고', 그 '곳'은 허구적 공간이지만 현실을 피해가지 못할 만큼은 실재하는 공간이고, 그 곳의 '시간'은 먼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담고있지만 역시나 현실을 피해가지 못할 만큼은 우리와 나란한 시간이다.
그 곳에 깃든 모든 생물(인간군상, 개..)들과 무생물(그라인더, 게임..) 들의 삶과 죽음과 영원을 작가는 조금은 비장한 느낌으로, 조금은 연민을 담아 서술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신, 천사의 경우는 생물에 넣어야할지 무생물에 넣어야할지, 잠시 혼동이 든다. 불멸하는 생물은 없으니까 말이다.
이렇듯 태고에 깃든 것들의 '시간'을 주체를 바꿔가며 짧게짧게 쓴 많은 조각들이 모여 커다란 서사가 완성되는데, 각각의 조각들은 그들만의 깊이와 광채를 지니면서 동시에 다른 조각들과 얽혀있게 된다. 이런 부분에서는 정세랑 작가의 <피프티 피플>이 떠오르기도 했다.
'지금'의 시대에, 어떤 작품에 대해 이른바 賞이라는 걸 준다면, 바로 이런 작품에 주는 것이 합당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읽었다. '지금'의 우리가 고민하고 의심할만한 모든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태고'는 한 시대, 한 국가(폴란드)의 시간이 아닌 '지금'의 모든 공간을 품은 시간이었다.
그 시간 안에서 지금의 '나'를 중심으로 세상은 돌아가게 마련인 것 같다. '나'를 뺀 세상, '지금'을 뺀 시간은 어쩌면 주변부이고, 배경일 뿐이어서 내가 사라지는 순간 동시에 사라져버리고 마는 것이다. 책이 이야기하듯이 여기서 '나'는 인간뿐 아니라 모든 동식물, 모든 무생물일 수 있다. 만물에게는 모두 자기만의 세계 경험이 있고, 그러므로 자기만의 시간을 가지게 된다. 이런 사고의 흐름 속에서 '시간'을 보는 특별한 경험을 이 소설을 읽는 동안 해볼 수 있었다.
우리가 살면서 원하는 것들은 늘 충돌한다. 불변과 불멸을 원하며 동시에 변화를 원하고, 타인을 필요로 하면서 타인이 지긋지긋하기도 하다. 평화를 원하지만 스스로 전쟁을 만들어 자연과 신의 개입없이 스스로를 파괴하기도 하는 것이 우리 인간들인 것 같다. 이런 부조리함과 충돌이 에너지가 되어 인간의 삶이 움직이는 것도 같다. 그것의 방향성에 대한 문제는 또 다른 이야기가 되겠지만...
소설이 진행되면서 각가의 인물들의 시간은 그들과 함께 사라진다. 그 중 이지도르의 죽음 앞에서 크워스카는 이렇게 말한다. "크워스카는 이지도르를 향해 몸을 숙이고는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세상 어디에도 머물지 말고, 얼른 떠나렴. 다시 돌아오라는 꼬임에도 절대 넘어가선 안 돼.'" 우리는 농담처럼 '이번 생은 망했도, 다음 생에...' 운운하기도 하는데, 솔직한 나의 심정은 크워스카의 조언처럼 절대 꼬임에 넘어가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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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의 과정에 수년의 세월이 흘렀고, 나쁜 인간은 결국 숲에 왔던 애초의 그 남자와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다. 나쁜 인간은 이미 그 자신이 아니었고,...
(과거가 현재의 '나'를 만드는 것처럼, 망각은 다른 '나'를 만드는 것일까?)
...은 상속자에게 깨달음을 주었다. 뭔가가 변화하고 나아질 것이라는 생각, 모든 것은 발전한다는 확고한 믿음, 모든 종류의 낙관주의는 결국 청춘이 품고 있는 가장 큰 기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이러한 기만은 어쩌면 '문명' 이후에 비로소 일반화된 것이 아닐까?)
사물은 시간도 움직임도 없는 다른 현실 속에 몸을 담그고 있다. 단지 그 표면만 드러나 있고,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나머지 속에 물직적 대상의 의미와 본질이 숨겨져 있다.
(생물의 눈으로는 포착할 수 없을만큼 미세한 닮아짐만으로 시간을 인식하는 것이 무생물의 삶일까?)
인형처럼 조그만 미시아의 옷가지들은 항상 미하우를 뭉클하게 만들었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빨래줄에 걸려 있는 옷가지들을 보니, 시간이 이토록 빨리 흐르고 있음에 분노가 치밀었다.
(시간의 흐름에 '분노'하는 지점은 모두 다르겠지? 아이가 자라는 것이 뿌듯하기만 한 부모는 없을지도 모른다.)
이 게임은 여행의 일종이다. 여행길에서 가끔 선택의 기회가 나타날 것이다. 선택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게이머는 때로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것 같은 느낌에 빠지기도 하리라.
(의지로 선택한 것 같은 느낌마저 없다면 너무 슬프겠지?)
카인이 벌판에서 아벨을 만났다. 그가 말했다. "법도 없고, 법관고 없어! 저승도 없고, 정의로운 자를 위한 상도, 악한 자를 위한 벌도 없지. 이 세상은 신의 자비로 만들어진 게 아니고, 연민으로 다스려지지도 않아. 그렇다면 어째서 네 제물은 받아들여지고, 내 제물은 내쳐진 거지? 대체 죽은 양 따위가 신에게 무슨 소용이라고?" 아벨이 대답했다. "내 재물은 받아들여졌어. 나는 신을 사랑하니까. 네 제물은 버려졌어. 너는 신을 증오하니까. 너 같은 인간은 애초에 존재해선 안 돼." 그리고 아벨은 카인을 죽였다.
('게임 설명서' 중에서
(평행우주가 존재한다면 그 곳엔 아벨의 후예들이 살고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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