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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램프 속 토끼책방
  • 느리게 천천히 가도 괜찮아
  • 박건우
  • 12,420원 (10%690)
  • 2019-04-15
  • : 567

그날 그날의 의식주만 온전하게 해결되면 행복할까? 최소한의 의식주 기준이 자꾸만 높아져가다보니 그런 소박한 행복에서 우리는 점점 멀어지고 있는지 모른다. 이 여행기는 바로 그런 행복, 최소한의 것으로도 충분했던 기록이다.

예전에 어느 여행 작가 인터뷰 중에 '여행기가 고생스러울수록 책이 잘팔리다'는 요지의 이야기를 했던 게 기억난다. 그야말로 여행의 고생담이 세일즈 포인트가 되는 시대인가 보다. 그래서인지 의도적인 고생과 위험감수를 담은 여행기가 내게는 오히려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일종의 '고생담'이 포인트처럼 보이는 이 책은 내게 공감과 순간적인 감동을 주었고, 무엇보다 매우 재미있었다. 아마도 '미니멀리스트 박작가'라는 이 작가의 유튜브 채널을 보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 자신이 기준이 되어 당당하게 살아가는 모습, 가끔은 지나치게 솔직한 모습을 보며 '삶'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그의 태도에 어느정도 마음을 열고 있는 상태로 읽어서인지, 구어체에 가까운 문장투에 저절로 작가의 얼굴이 떠오르기도 했다.

매사에 미니멀을 지향하고, 싫어하는 일은 가급적 하지 않고, 좋아하는 일은 눈치없이 해버리고 마는 작가의 생활이 그대로 여행에 옮겨진 착실한 기록이었다.

여행에 나선 이유부터가 심상치 않다. 돈이 없어서 떠난 여행이니 말이다. 보일러 기름값은 비싸고, 두툼한 옷도 마땅치 않아서, 무조건 더운 곳을 찾아 이들 부부 (박작가와 열살 연상의 일본인 부인)는 대만으로 향한다. 예산은 식비와 숙박비까지 모든 비용을 더해서 하루 만원. 당연히 야영을 위한 텐트를 짊어진 도보여행이었다. 그렇게 68일간, 총 1,113.58km를 걸었다. (그리고 서울로 돌아왔을 때 집의 수도관이 동파되어 물난리가 나 있었다고 한다.)

하루하루 잠자리를 걱정하며 걷지만, 어떻게든 등을 누이게 되고, 아주 가끔은 뜻밖의 횡재를 하기도 했었다고 하는 이야기. 예산에 맞추느라 늘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서 둘이 나눠먹는 이야기 (그 감질남에 대한 투덜거림), 식당 앞 공짜 커피 자판기에서 무려 다섯잔의 커피를 빼먹은 이야기(식당 주인아저씨에 대한 죄송함을 뒤늦게 전하면서). 냉정한 거절에 마음이 자꾸만 쪼그라들었던 시간들에 대한 이야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뜻한 이야기를 만들어낸 대만인들의 마음과 작가 부부의 마음이 담겨진 이야기들...

작가는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큰 접대까지 일일이 사진을 찍고, 횟수를 세어 기록하고 있다. 귤 하나를 받아도, 버리려던 자전거를 얻어도 이렇게 기록하고 빠짐없이 책에 싣는 일은 '기억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이것을 '구호물자 수령'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데, 여행 중 모두 51번을 받는다. 아무리 작은 물건이라도 그것을 전해주는 사람이 건네는 온도는 큰 것을 내놓는 마음과 다르지 않음을 잘 알기에 기록하고 기억하려는 작가의 마음에 공감하고 싶다. 사실 아까워서, 혹은 수줍어서, 혹은 귀찮아서, 줄 수 있는 많은 기회들을 나는 지나쳐버리기 일쑤이다. 때로는 꼭 줘야만했던 순간도 흘려버렸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대만인들이 '구호물자'를 전해주는 장면들 마다에서 나는 왠지 가슴이 뜨끔거렸다. 그것들을 받고 진심으로 감사하는 장면들 마다에서도 역시 가슴이 울리는걸 느꼈다.

그리고 과거 자신의 미숙함을 선선히 인정함으로써 현재의 자신이 성숙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들이 많았던 점도 좋았다. 짧은 반성 끝에 결국은 다시 비슷한 '짓'을 되풀이하고 말지만 그래도 과거의 나보다 조금이라도 성장한다고 느끼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자, 나이를 거저 먹지는 않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얼마나 반짝이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몇 번이고 키득거리며 읽을 수 있는 것이 이 책의 매력이다. 작가 특유의 솔직한 말투와 표현, 특히 사진 설명을 꼼꼼히 읽는게 중요한 책이다. 예를 들면 179쪽 사진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학교를 떠나던 아침에 공익근무요원이 그려준 초상화. 내 얼굴을 보니 그는 극사실주의에 재능이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초상화 속 작가의 얼굴은 만화 속 남자 주인공처럼 멋지게 그려져 있다)

킬킬거리며 재미있게 읽다가 문득문득 세상 어딘가의 따뜻함에 대해 떠올리게 되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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