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의 취지를 완전히 몰각시켜버린 이런 글이 이 책에 대한 오해를 불러와 이 책을 사람들로부터 떨어뜨려버리는 것을 염려하여 글을 쓴다. 저 사람의 비판글이 어떠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지는 다음의 예화를 통해 알 수 있다.
선생 : 오늘은 다윈의 자연선택이론에 근거하여 현대의 진화론이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를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학생 : 선생님, 다윈의 자연선택이론은 잘못된 가설입니다. 창조론이 옳습니다.
선생 : 학생은 창조론자군요. 네, 알겠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자연선택이론이 옳으냐 창조론이 옳으냐에 대해 토론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선택이론에 근거한 현대 진화론의 발전과정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창조론도 있지만 오늘은 진화론을 배우도록 하겠어요.
학생 : 왜 자연선택이론만 다루는거죠? 창조론도 함께 다뤄야 해요.
선생 : 오늘은 진화론 수업시간이니까요..
학생 : 이거 완전히 빨갱이 새끼네(왜 빨갱이란 단어를 썼는지는 위 후기를 남긴 사람이 자신의 글에 남긴 댓글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책은 성서고고학적 논증이나 사본학적 논증을 다룬 글이 아니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마가 우선설’과 ‘두 자료설’이라는 통설을 받아들이고 있다(마태우선설을 언급하기는 한다). 이 두 가설을 논증하는 책이 아니란 것이다. 이 두 가설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기반하여 Q의 구조나 내용을 살펴보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그러나 Ego라는 사람은 이 책이 무슨 사본학적 증명을 다룬책인 마냥, 저자는 다루지도 않는 논증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일종의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하나하나 내용을 살펴보자. Ego라는 사람의 저자에 대한 인신공격이나 자신의 의견을 쓴 부분은 다루지 않겠다. 단지 이 사람이 왜곡하고 있는 객관적인 text에 대한 부분만 다루도록 하겠다.
[복음서 연대는 마가를 예루살렘 함락 직후인 70년이라고 하지만 그 이전의 네로 박해때인 64-67년으로 본다는 소수의견은 언급하지도 않는다. 왜냐면 Q자료 형성 시기와 맞추어야 함으로]
→ 이 책은 마가복음에 대한 모든 가설을 소개하는 책이 아니다. 왜 굳이 그런 소수설까지 소개해야 하는지..? 그리고 Q자료 형성 시기와 맞추어야 하므로 저작연대를 유대전쟁이후로 잡았다고? 저자는 그런 소리 한적 없다. 명확하게 왜 유대전쟁 이후인 70년대로 보는지를 설명한다. 텍스트를 살펴보자.
“마가는 이 줄거리를 전쟁이 끝난 후 비로소 상상할 수 있었던 짝을 이루고 있는 두 사건, 곧 예수의 죽음과 성전의 파괴를 결부시킴으로서 완성시켰다(P25)”
저자는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마가복음서에는 유대전쟁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내용이 나오므로 70년 이후로 잡은 것이다. 난 이 설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얼마든지 복음서의 내용을 유대전쟁과 연결시키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왜곡은 하지 말아야지. 이 내용은 너무나도 잘 알려진 내용이다. 어떤 멍청한 학자가 이렇게 잘 알려진 내용을 무시하고 억지로 Q에 맞춰서 연대를 잡나? 단지 자신이 믿는 신념에 어긋나니 텍스트마저 자신이 만들어 놓은 저자의 이미지에 맞춰 읽은 것이다.
[Q자료이 또 다른 증거로 삼은 외경인 도마복음서의 연대기가 정확한 것인지. 발견된 종이들은 130-250년으로 저작시기를 60-140년으로 추정. 이에 비해 요한복음은 발견된 종이가 125년에 저작시기는 90-100. 이상하지??]
→ 텍스트의 저작연대가 사본학만으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다. 요한복음의 연대를 90-100으로 잡은 것은 텍스트에 나타나 있는 시대상 역시 반영하였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에는 유대인의 관습에 대한 용어설명이나 기독교인들이 회당에서 쫒겨나는 시대상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얌니아 회의에서 유대교 경전이 확립된 이후인 90년 이후로 보는 것이다. 도마복음서는 어록집이기 때문에 정경복음서들에 비해 시대상 반영이 약해서 고무줄처럼 연대를 잡는 것이다. 안 이상한데?
설명은 했다만 이것 역시 저자가 다루고 있는 내용이 아니다. 이러한 저작시기 문제에 대해서는 저자는 기본적으로 기존의 연구에 의지하고 있다. 즉, ego라는 사람은 타겟을 엉뚱하게 잡고 있는 것이다.
[전쟁이 빈번하던 시기에 갈릴 리가 전략적 요충지, 교두보라고 주장하면서도 정작 그 누구도 주인이라고 주장이 없었단다. 이상하지?]
→ 텍스트를 살펴보자.
“갈릴리가 다윗과 솔로몬 왕국에 속했던 기간은 100년 미만이었고.... 갈리리는 앗시리아에 속한 지방으로 합병되고, 그 후 네오 바빌로니아에 할양되어, 페르시아에 침입을 당하게 되었고.(p82)”
“그들의(하스모니아 왕조) 판도를 확장하는 사업을 위해서는 또 다시 40년의 군사행동이 필요했고, 최후로 갈릴리는 B.C. 100년에 합병되었다.(P83)”
명확하게 합병당했다고 쓰여져 있는데? 저자가 의도한 것은 갈릴리가 한 문화권에 오래 종속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예루살렘과는 달리 자신들만의 혼합적인 독특한 문화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한 번도 정치적 지배를 받은 적이 없다고 주장한 적이 없다. 이 역시 자기가 원하는대로 저자를 변형시켜 읽은 오독.
[견유학파는 지극히 개인적 성향이 있었음에도 예수운동의 Q공동체는 왜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이상해]
→ 거의 한 챕터를 잡아가며 이 과정을 설명한다. 도대체 뭘 읽은거지? 굳이 요약된 부분을 찾는다면 다음과 같다.
“사회라는 무대에 들어가서 늑대를 상대하라는 견유학파적인 도전적인 말씀이 집단적인 사명감을 가진 그 공동체의 운동에 적합한 인스트럭션으로 변해진 것이다(P170).”
“여러 종류의 그룹이 각지에 형성되어 예수의 교훈이 화제거리가 되기 시작하자 동지 의식을 서로서로 인정하는 일이 중요하게 되었으며, 활동 무대는 대중적인 영역으로부터 가정의 공동체로 옮겨졌다. 보다 이른 시기의 견유학파적인 삶의 형태는 사회와의 비판적인 만남을 위하여 필요했던 것이었기 때문에 부적절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 하느님의 통치에 따라 산다는 것의 의미는 그 공동체 안의 인간과 여러 가지 문제와의 관계에서 재조정되어야만 했다. 그러므로 견유학파적인 권고를 공동체의 규율로 삼아 Q1 가운데 정리하는 작업은 사회적 공동체 형성을 위한 응답이었다고 이해된다(P172).”
이 내용을 받아들이는 것은 독자의 마음. 하지만 설명한 내용을 하지 않았다고 하면 안 되지. 이상한 것은 저자가 아니라 한 챕터의 내용을 완전히 잊어버린 사람인 듯.
[견유학파에 대한 자료는 B.C.50년 정도에 제한되어 있었고, 사실 본격적인 유행은 로마의 흥왕과 함께한 AD100년정도인데 그렇다면 예수는 견유학파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견유학파의 선구자쯤이 된다. 갈릴리에서]
→ “예수운동은 전쟁 전의 갈릴리, 즉 견유학파적 생활방식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던 상황에서 자생적인 견유주의(home-grown Cynicism)로 시작된 것이다(P159).”
저자는 예수가 견유학파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라 주장한 적이 없다. 다만 그 시대상이 견유학파적인 생활방식을 준비하고 있었기에, 예수는 거기에 맞춰 자생적으로 견유학파적 삶의 방식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ego라는 사람이 비꼬아놓은 견유학파적인 운동가의 선구자로서 예수를 보고 있는 것이다. 그걸 읽지 못하고 무슨 저자가 시대착오를 일으킨 것 마냥 글을 쓰고 있다. 물론 자생적인 견유학파적 예수를 받아들일 수 있느냐는 독자의 몫이다(개인적으로 나도 이런 견유학파적 예수상엔 동의하지 않는다. 저자가 제시하고 있는 것만으로는 개연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다만 텍스트 자체를 잘못 파악하고 있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사족을 하나 덧붙이자면 갈릴리에서는 저런 운동이 생겨날 수 없다는 건 어디선가 들어본 말 같지 않은가?
'나다나엘이 가로되 갈릴리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요 1:46)'
후기를 남긴 이의 조롱을 그대로 돌려주자면, 그리스도 신앙 역시 갈릴리에서 나올만한 것이 아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바랐던 것은 정치적 메시야였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그리스도가 아니었다.
[초창기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었던 것은 예수의 이적이 아니라 견유학파의 재치와 해학, 날카로운 시대적 격언들이라고 하는데, 이는 가정에서 기적에 관한 문구삭제에 기인한다. 즉, 가정에서 기적을 제외하고는 그렇다면 인기의 원인은 격언의 스타일이라는 거다. 그러므로 Q자료에서 기적을 제외 시킬 수있다는 이는 동의어 반복일 뿐이다.]
→ 텍스트를 살펴보자.
“Q의 말씀들 가운데 일곱 개의 말씀 묶음(Q1층)들에 나타나는 공통적 특징들이 다른 부분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점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P141)”
“학자들이 Q전승의 초기층으로 확신하는 이유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 이유들 가운데 어떤 것은 ‘봉합점’, 즉 주제를 자세하게 말하거나 확대할 때, 몇 개의 말씀이 다른 말씀에 첨부된다든지 또는 연결되었다는 사실이 확실한 지점을 규명한 것과 관계가 있다... 그 한 예로서 QS21의 소돔에 대한 언급은 그 직전의 Q1의 말씀, 즉 예수운동을 받아들이지 않는 동네에 관한 말씀과, 그 다음에 이어지는 갈릴리 동네들에 내려질 심판의 Q2의 주제로 바뀌는 봉합점이다.(P142)”
Q자료에서 이적설화들이 제외되는 것은 학자들이 자의적으로 제외시켜서 제외된 것이 아니다. 그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이 근거를 비판하지 않고, 그냥 저자가 자의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게다가 실제로 백부장의 종을 치료하는 이적설화(마8:5, 눅7:1-10)는 Q에 남아있다. 만약 자의적이었으면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 이 이적설화는 제외했을 것이다.
난 이 책이 무조건 옳고 기존의 기독교 신앙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비종말론적 예수에 대한 담론은 그렇다치고, 너무 그 당시 민중들의 상황을 배제해버린듯한 견유학파적 예수의 모습에는 나 역시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다만 한 텍스트를 비판하려면 그 저자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고 비판해야지, ego라는 사람처럼 text를 왜곡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꼭 지적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