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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TIGO님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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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맞았다. 맞은 편 건물의 같은 층에서 들려오는 피아노 곡, 엘리제를 위하여. 학 

원에서 연습중인 곡인지 툭툭 끊어지며 벌써 대 여섯 번 반복되었다. 제영은 건반을 두드 

리는 수준을 가늠하여 10살 남짓한 여자아이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도 어릴 적 누나들을  

따라 피아노 학원을 졸졸 따라다녔다. 변기에 앉아 엄지발가락을 긁으면서 ‘워털루 전 

투’를 흥얼거리고 있다가 멈췄다. 바깥 거실에서 냉장고 문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숙여 가랑이 사이로 자신의 가늘고 긴 똥을 바라보고 있다가 딸깍 방문이 닫히는 소리에  

제영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달콤한 냄새가 콧속으로 잉크자국처럼 스며들었다. 가슴이  

답답해진 게 큰 누나 때문만은 아니었다. 제영은 다시금 발바닥에서부터 차오르기 시작한  

뿌연 상념의 잡초를 의자삼아 잠시 쭈그린 채 멍하니 수채 구멍을 바라본다. 어떻게 이 조 

그마한 구멍에서 바퀴벌레나 집게벌레가 따위가 올라올 수 있는 것일까. 그의 시선이 점 

점 흐릿해지다가 텅 비워졌다. 그때다. 문득 빳빳이 몸통을 치켜세운 흰 뱀이 나타난다.  

제영은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 한손으로 햇빛을 가릴 차양을 만들듯 얼굴을 막았고, 눈에  

초점을 주자 그것은 긴 호스와 거기에 연결된 머리로 구성된 샤워기였다. 얼른 근육을 움 

직여 현실 감각을 찾아야 했다. 머릿속의 안개를 털어버리기 위해 가장 도움이 되는 게 청 

 소다. 제영은 화장실에서 나와서 주방으로 갔다. 물컹거리는 음식물 봉투를 집어 들어 1 

층으로 내려올 동안 뚝뚝 흘러내린 누런 물이 바닥에 검은 점을 찍었다. 봉투 속의 음식물 

은 10일은 족히 지난 탓에 이미 형체 없는 관념처럼 썩어있었다. 또 다시 몰래 버려야 했 

기 때문에 골목을 내려가는 제영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두 달 전 즈음에 현관 앞의 음식 

물 쓰레기통이 사라진 이후로 골목 어귀의 어느 집 앞에다 몰래 버려오다가 집 주인에게  

걸린 게 막힌 수체구멍으로 작은 누나에게 화를 낸 날이었던 것이다. 한 번만 더 걸리면  

고발하겠다던 주인아주머니의 날선 경고가 살갗을 도려내는 칼바람에 섞여 있었다. 
 

제영은 빈손으로 서둘러 골목길을 빠져나와 잽싸게 되돌아왔다. 현관문 안으로 몸을 숨긴  

후 목격한 사람이 없는지 잠시 두리번거렸다. 3충까지 올라와 집에 들어서려는 데 문득 은 

행이 떠올랐다. 좀 더 신중했더라면 두 가지 일을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었을 텐데. 짜증 

이 찌르르 올라와 바닥에 뱉은 침이 음식물 봉투에서 떨어진 누런 물 위에 겹쳤다. 계단을  

내려오며 주머니를 더듬자 지갑 대신 핸드폰이 살갗에 닿았다. 오른쪽엔 어제 연장 계약 

을 완료한 서류가 구겨진 채로 주인아주머니의 나긋나긋한 목소리와 함께 만져졌다. 형제 

들 간에 참 우애가 좋은 거 같다고 주인아주머니는 말했던가. K와의 약속시간이 잠깐 떠 

올랐다 사그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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