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기다렸던 책이 '드디어' 출간되었다.
단순한 동화가 아님에도 아이들이나 읽는 동화처럼 취급되어 제대로 된 번역이 이뤄지지 않았던, 판타지의 고전의 반열에서 급기야 동시대의 철학적 텍스트가 된 작품을 마주하는 즐거움은 그 기다림에 대한 반가움만큼이나 강렬하게 다가온다. 그도 그럴 것이 적어도 원작의 두 배는 될 듯한, 원작만큼이나 풍부한 상상력으로 무장한 주석까지 상세하게 덧붙여져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주석자인 마틴 가드너는 앨리스의 원작 삽화가였던 존 테니얼의 알려지지 않은 삽화까지 찾아 수록해 놓았다. '결정판'이라는 말이 전혀 무색하지 않은 것이다.
아마도 이 책을 통해 우리는 그간 확인할 수 없던, {앨리스}에 숨겨져 있는 수학적 상징을 비교적 명쾌하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며, 이를 통해 왜 이 책이 디지털 시대라 불리는 이 시대에 '다시' 각광(이 책의 친절한 각주들을 보면 {앨리스}가 당대의 작가들의 작품에도 수없이 인용되고 있으며, 그들 작품의 상상력의 원천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는 아일랜드의 고집쟁이 제임스 조이스마저 어렵기 그지없는 책, {피네건의 경야}에 {앨리스}를 인용하고 있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 책 49쪽 참조)을 받고 있는지 알아 낼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즐거운 병의 향연'이라 할만한 루이스 캐럴의 아름다운 욕망 또한.......
{앨리스}는 디지털 공간의 '혼융' 혹은 '변화'의 속성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텍스트다. 접속 코드와 같은 구멍, 무한한 변화를 '몸'으로 보여주는 주인공 앨리스, 그리고 실재와 비실재, 현실과 비현실이 혼융되어 있는 공간 혹은 공간성. 너무 간단한 언급이지만, 이러한 속성 혹은 미덕 때문에 {앨리스}는 우리 시대의 작가들에게 열렬한 조명을 받고 있다.
촬영 기법이나 내용 등 거의 모든 면에서 SF 영화사에 한 획을 그었다고 평가할 수 있는 '매트릭스'를 보면 우리는 이 점, 즉 {앨리스}가 어떤 방식으로 인용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어떻게 동시대의 텍스트가 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주인공 네오는 검은 모니터(구멍)를 통해 전해온 한 문장, 곧 "흰토끼를 따라가라"는 문장을 통해 이곳이 아닌 다른 세계로 빠져든다. 세계의 모든 것이 실재가 아닌 허상일 뿐이라는 진리를 터득하는 계기가 된 것이 '구멍'과 '토끼'였던 것이다. 이는 앨리스가 비실재(판타지)의 경험을 통해 실재의 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과 정확한 대칭을 이룬 채 일치한다.
같은 시퀀스에서 천재적인 형제 감독(래리&앤디 워쇼스키)은 {앨리스}가 지닌 이러한 현재성을 매우 적절한 비유 혹은 상징으로 표현하는데, 그것은 또 다른 인용으로 나타난다. 다름 아닌 {시뮬라시옹}과의 병치. 문을 두드리는 흰토끼 일행에게 줄 CD를 네오는 현대의 고전이자 디지털적 세계에 대한, 또는 그러한 세계로의 변화에 대한 영향력 있는 저작인 시뮬라시옹(장 보드리야르)의 '구멍(책 속은 검은 사각의 구멍으로 보여진다)' 속에서 꺼낸다. 이는 {앨리스}가 단순한 캐릭터나 사건의 인용이 아닌 '매트릭스'라는 작품의 전체적인 구조 혹은 세계관과 연관되어 있음을 알려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앨리스}는 과거의 어떤 책이 아니라 현재 이곳의 책으로 문화 속에 그려지고 인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 시대의 작가 중 한 사람인 미야자키 하야오의 걸작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떠올려 보라. 조그마한 터널(검은 구멍)을 통해 비실재적 공간으로 들어가 '성장'을 하고 돌아오는 소녀의 이야기 말이다.
여담이지만, 이 책의 108쪽을 보면 같은 감독의 또 다른 걸작 '이웃의 토토로'의 명장면인 나무 위의 고양이버스와 너무도 유사한 삽화가 인쇄되어 있다. 하야오 역시 {앨리스}의 전체적인 세계와 함께 그 속의 디테일까지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우리의 작은 소녀 '메이'는 토끼처럼 희고 귀가 큰 작은 토토로를 따라 나무들로 이루어진 작은 '구멍' 속으로 들어가 나무 '구멍' 속에서 자고 있는 커다란 토토로를 발견한다).
어쨌든, 그러니, 이 '커다란' 현재의 고전을 읽는 것이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더구나 이 책, {앨리스}는 한 위대한 환자의 아낌없는 사랑으로 태어난 작품이 아니던가? 그러니.......
나보코프의 {롤리타}가 출판된 이후, 비록 그렇게 불리고 있긴 있지만, 소녀 페티시즘은 '롤리타 콤플렉스'라기보다는 '앨리스 콤플렉스'로 불려져야 한다. 하지만 이름이 무슨 상관이겠는가?
페티시즘은 일종의 성적 전도 혹은 욕망의 전도다. 평범하지 않고, 일상적이지 않고, 일반적이지 않은, 그리하여 평범하고 일상적이고 일반적인 사유 속에서는 '변태'라는 이름으로 도외시되고 있는 전도. 하지만, 예술은 혹은 예술 행위는 결국 표현의 욕망과 표현된 것이 만나는 페티시즘의 장이 아니던가? 세계를 세계 자체로 표현할 수 있는 자, 표현하고 싶은 것을 표현하고자 하는 모든 것으로 표현할 수 있는 자가 누가 있겠는가? 보드리야르의 표현({사물의 체계})에 따르자면, 현대는 명명의 체계가 불가능할 만큼 급변하는 세계가 아니던가? 그러니 어찌 총체성, 주체의 완전한 표현이 가능하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페티시즘은 어쩌면, 가장 솔직한 욕망의 표현, 또는 표현의 욕망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캐럴은 소녀 '앨리스'에 대한 성취할 수 없는 욕망을 이 책 {앨리스}를 통해 성취(? 캐럴에겐 모르겠지만, {앨리스}는 말 그대로 성취라 할 수 있을 것이다)한다. 도무지 성취될 수 없는 그 욕망, 곧 사랑을 말이다.
어째서 그가 전도된 사랑을 하게 되었는지, 어찌하여 그러한 욕망을 갖게 되었는지 묻는 것은 바보 같은 질문이다. 우리는 그저 그의 전도가 작품을 통해 재전도를 이뤄 예술로 승화되는 '카니발' 혹은 향연을 즐기면 그만일 뿐이다. 세계의 부조리와 그것을 통한 성숙을 어른이 아닌 친구의 마음으로 연인의 마음으로 바라보고, 기원하고 있는 한 중년 사내의 소녀에 대한 정성어린 사랑을 가슴으로 느끼면 그만일 뿐인 것이다. 병이라고 치부되고 있는 그 전도를 즐거운 병으로 만든 한 아름다운 환자의 향연에 행복한 마음으로 빠져들면 그 뿐인 것이다.
그러니 '롤리타 콤플렉스'건 '앨리스 콤플렉스'건 이름이 무어 중요할까.
오래 기다렸던 책을 드디어 읽었다. 읽었지만, 아직도 읽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오래 오래 두고 두고 몇 번이고 읽어가며 환상과 사랑의 병에 빠져들고 싶다. 그러다 보면 우리의 양소유({구운몽})가 꿈에서 깨어나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듯 즉 현실을 직시할 수 있었듯 우리의 현실을 더욱 치열하게 인식할 수 있지 않을까?
아무려나 이 즐거움을 이 병의 즐거움, 즐거움의 병의 향연을 함께 나누고 싶다. 아직도 예술적 환상이 우리의 삶과 사랑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책 속(pp.197-198)에서
그러므로 어서 와서 들으렴.
가혹한 세월에 시달린 두려움의 목소리가
그대를 반갑지 않은 침상으로 부르기 전에.
우울한 아가씨여!
우리는 단지 임종의 시간이 가까운 것을 알고 초조해하는
좀더 나이 든 어린아이들일 뿐.
집 밖에는 눈앞을 가리는 눈과 서리.
폭풍의 우울한 광기 -
집 안에는 벽난로 불빛의 빨간 열기와
어린 시절 보금자리의 즐거움.
마법의 말들이 순식간에 그대를 사로잡으리.
그대는 미쳐 날뛰는 돌풍을 알아채지 못하리라.
비록 이야기 속에서
한숨의 그림자가 가냘프게 떨릴지 모르지만.
‘행복한 여름날’은 지나갔기에,
여름날의 영광은 사라졌기에 -
하지만 고통의 한숨도
우리 이야기의 즐거움을 시들게 하지는 못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