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평) 세 개의 주파수, 잡음까지 매혹적인 작품
이 책을 읽으며 ‘주파수’를 떠올렸다.
예전에 라디오를 들으려면 다이얼을 돌려 주파수를 맞춰야 했다. 같은 방송이라도 지역마다 주파수가 달랐고, 조금만 어긋나도 소리는 금세 지지직거렸다. 이 책도 그랬다. 세 명의 작가가 하는 같은 이야기. 그런데 그 말에 도달하는 주파수는 모두 달랐다. 책장을 넘기며 계속해서 다이얼을 돌려야 했다. 이번에는 맞는 듯하다가도, 다음 페이지에서는 다시 미세하게 어긋났다.
그래서 이 책을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어떤 한 작가의 글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단 뜻은 아니다. 오히려 각각의 글을 조금씩, 아주 살짝 놓쳤다는 느낌에 가까웠다. 소리가 끊기지는 않지만, 어딘가에서 계속 지지직거리는 라디오처럼.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불완전함이 신선했다. 모든 음을 또렷하게 듣지 못해도, 그 잡음까지 포함해 하나의 음악처럼 들리는 순간들이 있었다.
시인의 글은 산문과 시의 경계를 넘나들며 흘렀고, 특히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는 대목이 좋았다. 그 시절의 기억에는 늘 공포와 즐거움, 설렘이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정확히 건드렸다. 무섭지만 눈을 떼지 못했던 순간들, 알 수 없어서 더 반짝이던 감정들. 읽으며 “그래, 이랬지”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장면들이 있었다.
극작가의 파트에 이르러서는 전혀 다른 주파수가 튀어나왔다. 이건 정말로 경찰에 신고해야 하는 상상력이다. 유다와 사탄을 한자리에 불러내더니, 유다가 사탄에게 39금 플러팅을 한다. 웃지 않으려야 웃을 수가 없었다. 신성함과 천박함, 종교와 욕망을 같은 테이블에 앉혀 놓고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를 시키는 태도는 노골적이면서도 대담했다. 이 부분에서 책은 분명히 ‘블랙코미디’라는 장르를 가장 솔직하게 내 수준에서 가장 명확하게 수행했다.
마지막 만화 역시 비슷했다. 큰 줄기는 이해했다. 말하고 싶은 방향도 알겠다. 다만 그것을 완전히 붙잡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마치 설명할 수 없는 꿈을 꾼 뒤의 감각처럼, 의미는 손에 남아 있는데 언어로 옮기면 미끄러지는 느낌이었다. 이해하지 못했다기보다는, 끝내 다 잡히지 않았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이 책은 자신의 주파수를 맞추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되려, 나는 이런 파장을 가지고 있는데, 너는 어떻게 읽혀? 너와 나의 파장이 만나서 어떤 또 다른 파장이 만들어질 건지 너무 기대돼. 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리고 세 개의 같지만 다른 신호를 보낸다. 이 이야기 속에서 그 사이를 오가며 듣고, 놓치고, 다시 맞춘다. 모든 문장을 완벽히 이해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는 책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지지직거림을 견딜 수 있다면, 혹은 그 잡음마저 음악처럼 들을 수 있다면, 이 책은 꽤 재미있는 청취 경험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