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 7살 무렵 대통령선거를 기억한다.
연립주택의 낡은 벽에는 대통령 후보의 사진이 붙어있었고
종이만 보면 낙서를 하던 나에게,
엄마는 벽보 얼굴에 낙서하면 큰일 난다는 이야기를 해주시곤 했다.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과연 누가 될 것인가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주워들은 나는
7살의 나이에도 DJ, JP 등의 약자로도 그들을 구분할 수 있었다.
마치 엄마가 쓰던 생리대를 따라서 쓰듯,
아빠가 좋아하던 야구단을 응원하듯 당연히 정치색 마저 마치 유전처럼 물려받았다.
그러나 2000년대 학번답게 정치색이 전혀 없던 대학시절을 보냈으며,
나에게 관심사라고는 오직 입사를 위한 스펙과 2002월드컵 그리고 한비야라든지, 류시화 정도였다.
돈만 생기면 역마살이 낀 마냥 여기저기로 비행기를 타고 쏘다니면서도
인도와 유럽 미국의 역사는커녕 내 나라의 역사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
역사를 몰라도, 철학을 몰라도
80년대 학번들처럼 마르크스를 읽지 않아도,
심지어 그가 독일인이 아니라 러시아인인 줄 알았더라도 내가 취업하는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회사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였다.
나에게 정치적 철학관이라든지, 정치색 같은 것은 없었다.
다만 입사와 함께 자동으로 들어가는 노동조합에 들어갔고,
연말정산을 위해 선배들이 권유하는 당에 정치 후원금을 내는 정도였고,
진보는 세련된 것, 보수는 구닥다리고 생각하던 30 40들이 있던 사무실에서 무색무취로 살아갔다.
그런 내가 역사와 정치 철학에 조금씩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아마도 나이가 들어서 오지랖이 넓어져서 일 것이다. 그래서 조금 더 오지랖 레벨을 높여 보자고 『처음 읽는 정치 철학사 』을 읽게 되었다.
책은 연대순으로 이뤄진 책이 아니다 역사상 가장 지혜롭다고 유명한 연구자 30인을 뽑았으며, 그들의 이야기를 선보인다.
모두가 다 흥미로웠지만, 특히 흥미로웠던 부분은
고대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근대의 데이비드 흄
현대의 간디와 구릅(이슬람 원리주의자) 그리고 한나 아렌트였다.
그중 간디의 이야기의 이 부분이 참으로 맘에 들었다
간디는 자신의 비폭력 저항 신념이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하며 도덕적으로 무결하다고 주장했다. 비폭력 저항은 박해자가 저지른 범죄의 대가를 자신이 치름으로써 상대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도록 한다는 논리를 따른다. 그런데 만약 박해자에게 양심이 없다면 양심을 향한 비폭력적 호소는 실패하게 된다. 예를 들어 국가는 양심이 없으니 국가 간 평화주의는 결국 침략자와의 타협을 의미하게 된다.
나치와 공산주의 정권에서 정권 앞잡이들의 인간적 양심은 사악한 이념에 의해 일부 또는 전부 막혀버린다. 이렇게 인간적 양심에 대한 호소가 불가능한 곳에서 비폭력 저항은 악을 상대로 힘을 쓸 수가 없다.
281P
학창 시절 비폭력 저항으로 나의 마음을 울렸던 간디에 대해 이런 시각을 바라보는 것은 색다른 즐거움이었다. (역시 나에게는 삐뚤어진 반골의 시각이 맞는 듯)
간디의 방법은 심지어 도덕적으로 무결하지도 않은데, 그 이유는
1. 단체 행동은 언제나 결백한 제삼자의 희생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 간디의 보이콧 운동으로 이에 동조한 방직공들이 해고되었다.
2. 간디의 단식은 당대 사람들에게 도덕적 협박으로 느껴졌다.
- 멈추지 않으면 죽어버릴 거야!
최근의 트렌드를 보면 간디의 방법은 올드 하긴 하다. .
악에는 더 큰 악으로 대응한다는 빈센조는 힘으로 내 사람들을 지켰다.
비질란테는 또 어떤가.
'법은 구멍이 나 있다. 내가 그 구멍을 메운다. 널 풀어준 법을 원망해라. '라고 말하며
낮에는 선량한 경찰대생. 밤에는 악인을 처벌하는 더 큰 악 바질란테로 활동한다.
거대 세력에 맨몸으로 저항하는 것의 어려움은 이미 검증되었다
하지만 본 방법도 먹힐 때가 있는데,
킹목사의 비폭력 정치는 미국 남부의 인종차별 법을 폐지한다는데 목적이 있었는데, 그가 성공한 것은 기복적으로 미국에 이미 기본적 시민 자유권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간디의 정치학은 어디에서나 효과를 발휘하지도 못하고, 도덕적으로 무결하지도 않다
그러나 또한 많은 경우 폭력을 대신해 사회적, 정치적 정의로 향하는 더 나은 방향을 제시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본책의 리뷰를 한나 아렌트의 말을 빌려 끝내려 한다.
한나 아렌트 그는 누구인가.
20세기 가장 탁월하고 독창적인 정치사상을 펼쳐낸 사람 가운데 하나인 그녀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완벽히 사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진정한 인간의 생에 핵심적인 것들을 박탈당한 채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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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 한마디로 우리가 왜 역사를, 철학을 그리고 정치를 알아야 하는지 정리할 수 있겠다.
몇 년간 나는 지극히 사적인 삶을 살았다.
아이를 키우는데 급급하여 오늘 하루 무사히를 외쳤으며 맥주 한 캔으로 나를 달래는 하루를 마무리했다.
나는 어쩌면 박탈당한 삶을 살았으며, 잠들어 있던 인생이었다.
이제는 오지랖을 좀 부려도 될 듯하다.
어떠한 방식이던지, 세상의 작은 등에 같은 존재가 되어봐야겠다.
(* 참고: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아테네의 등에 같은 존재라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