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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아님의 서재
  • 기파
  • 박해울
  • 10,800원 (10%600)
  • 2019-11-20
  • : 1,083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잘 만든 1인칭 어드벤처 스토리 게임을 플레이한 기분이었다. 소행성과 충돌해 난파 당한 우주 크루즈 오르카 호, 그곳에서 홀로 살아남아 정체불명의 외계 바이러스와 싸우는 '기파'라는 의사. 플레이어 '충담'은 그를 구출하여 지구로 돌아와야 한다. 그가 기파를 무사히 지구로 송환한다면, 그 대가로 그의 딸이 심장 수술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게임은 그렇게 시작되고, 충담이 기파를 추적하면서 오르카 호와 기파에 얽힌 스토리가 전개된다. 이 소설을 바탕으로 정말 SF 게임이 만들어진다면 많은 사람들의 가슴이 웅장해질 텐데....


이 소설은 다양한 종류의 로봇이 상용화된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책의 149쪽에 그 시대에 대한 설명이 잘 적혀 있다. 로봇의 상용화가 만들어 낸 새로운 형태의 신분제가 기존의 계급 체계를 대체했을 뿐, 모두가 편안한 삶을 누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인간은 기계를 하대하고, 기계가 섞이지 않은 온전한 인간은 사이보그화 된 인간을 차별한다. 온전한 인간을 고용하여 부릴 수 있는 온전한 인간이 진정한 부자로 추앙받는 시대에 충담은 하반신이 기계인 사이보그 인간이다.


충담 자신도 사이보그지만, 그의 딸 연이도 기계 심장을 가진 사이보그다. 그들 가족이 기계에 의존하여 살아가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율 주행 자동차의 인공지능이 내린 판단 때문이었다. 그의 일가족이 탄 차와 버스가 충돌하기 직전, 각각의 차량에 탑재되어 있던 인공지능은 소수의 희생으로 다수를 구하기로 합의한다. 그 판단 때문에 충담의 아내는 죽고, 충담의 하반신은 으스러졌으며 연이는 기계 심장을 갖고 살아가게 되었다. 이처럼 충담은 기계 문명에 증오심을 가진 인물이다.


그런 그가 오르카 호의 성자 기파를 찾아 떠나게 된 것은 우연이다. 연이의 기계 심장을 생체 심장으로 대체하거나 최소한 기계 심장의 수명을 연장하기 위한 수술비를 벌기 위해서라도 충담은 고물 우주선으로 우주 택배를 배달하는 일을 한다. 어느 날 그가 맡은 택배가 도난 사건에 휘말려 충담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소행성대까지 먼 여정을 떠난다. 끝내 도둑은 발견하지 못했지만, 대신 소행성대에 난파된 오르카 호를 발견한다. 지구에서 기파는 난파된 오르카 호에서 마지막까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싸우고 있는 의사로 알려져 있다. 기파의 이름을 내건 기파복지재단에서는 그를 찾아 무사히 지구로 송환하는 이에게 어마어마한 보상을 약속한 바 있다. 충담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어 오르카 호에 접근하고, 본격적인 이야기는 시작된다.


(여기서부터 스포일러 포함)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충담이 된 기분이었다. 충담이 되어 외계 바이러스가 창궐해 폐허가 된 호화 크루즈 선에 승선하고, 알 수 없는 인기척을 느끼고, 생존자를 발견해 협력하며 우주선의 곳곳을 조사한 것 같다. 작가가 이 배경을 설정하기 위해 많은 고민을 한 것이 느껴졌다. 단서를 하나씩 모으고, 인물과의 대화를 통해 호감도를 높이고, 숨겨진 장소를 찾아내는 모든 과정이 정말 내가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처럼 생생했다. 이 줄거리와 배경이 정말 게임으로 구현된다면 얼마나 재미있을지 감탄하며 읽었다.


충담이 발견한 생존자인 아누타라는 인물이 이 이야기의 진행에 기여한 바도 빼놓을 수 없다. 아누타는 완벽한 인간 승무원만이 서비스를 책임지는 오르카 호에서 그림자처럼 생활하며 각종 잡일을 처리하던 섀도 크루의 일원이다. 그녀는 기계 의안을 갖고 있었기에 매우 뛰어난 가상 영상 제작자임에도 불구하고 섀도 크루로 일해야 했다. 하지만 아누타가 섀도 크루로 일하며 섭렵한 선체의 비밀 통로와 비밀 공간들에 대한 지식과 기파의 동료 의사였던 이언과 나누었던 유대감은 이야기의 진행에 중요한 열쇠가 된다.


아누타와 충담은 둘 모두 완벽한 인간이 아니지만 기파의 진실과 마주하고 두 인물이 갖는 태도는 정반대다. 성자로 추앙받던 기파라는 인간은 사실 인간보다 우월하고 완벽한 이언이라는 로봇의 존재에 겁을 먹었던 사람이었다. 기파의 업적으로 전해져 칭송받던 모든 일은 사실 이언이 죽음으로 도망친 기파를 대신해 해냈던 것이다. 아누타는 꿋꿋한 사명감을 보여준, 이미 인간과 다름 없는 그를 받아들인다. 이언은 자신의 기계 의안을 비웃지 않았던 선내의 유일한 승무원이었고, 그와 함께 우주를 바라본 밤이 아누타의 기억 속에는 생생하게 남아 있었으니까.


그러나 충담은 그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언이라는 로봇이 승선 후 여러 번 위기에 처했던 자신과 모두를 구한 진짜 성자임을 인지하면서도. 지구에서 추앙받는 기파의 미담이 전부 거짓이라는 것에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끼면서도. 기파재단에서 요구한 대로 기파의 행세를 하는 이언을 사살해야만 한다고, 그가 결국 로봇이라는 사실을 되새기며, 연이의 수술을 떠올리며 자신을 계속해서 설득한다. 이언이 스스로를 파괴하기 직전, 충담과 나눈 대화에서 충담은 이 모든 진실을 은폐하고 자신과 가족의 안위를 택했다는 죄책감이 자신을 평생 따라다닐 것을 예감한다.


하지만 나는 충담을 탓할 수 없었다. 그는 인간이니까. 그 또한 시대의 피해자이니까. 나 또한 결과적으로는 충담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과정은 좀 더 온건할 수 있었겠지만, 결국 나는 기파의 시신을 찾고 이언을 폐기한 뒤 지구로 돌아왔을 것이다. 그리고 연이의 가슴 속에서 뛰는 생체 심장의 박동을 느끼며, 연일 보도되곤 하는 기파재단과 기파의 성과를 들으며 끔찍하게 괴로워했을 것이다. 진실을 밝히기로 마음먹는다 해도 거대하고 힘 있는 재단을 상대로 가난한 개인이 무엇을 할 수 있었겠냐고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이언, 충담, 아누타는 모두 완벽한 인간이 아니다. 인간을 조롱하기 위해 만들어진 완벽한 인간형 로봇, 로봇을 증오하는 사이보그 인간, 완벽한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의 능력을 온전히 뽐낼 수 없었던 사이보그 인간. 그들이 각자 자신들이 믿는 가치를 행하는 모습에서 나는 막막해졌다. 무엇이 인간이고 무엇이 인간이 아닌지, 우리는 왜 우리의 모든 것을 동원하여 서로를 착취하게 만들어졌는지. 인간은 대체 자신들이 뭐라고 생각하기에 이렇게까지 오만할 수 있는지. 많은 질문을 하며 읽었고, 그러면서도 결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인간이니까.


아누타와 충담은 둘만의 비밀을 안고 끝끝내 살아갈 것이다. 자신이 목격했던 인간 아닌 것의 이타심과 자신이 행한 인간의 이기심을 곱씹으면서. 책의 마지막 부분을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이대로도 괜찮은 거겠지? 제발 그렇다고 해 줘."

"하지만 통증은 사라지지 않을지도 몰라."

"그래, 아마 평생 사라지지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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