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는 진입 장벽이 있다. 두께, 그리고 세계관. 그렇지만 한 번 흐름을 따라가기 시작하면 장벽이었던 것들은 어느새 매력이 된다. 아직 책이 많이 남았다니, 두 권이나 더 번역될 예정이라니! 두툼한 분량에 감사하게 되고, 생소해서 어려웠던 세계관은 소설 속 세계에 깊이를 불어넣는다. 책의 첫 챕터를 읽다가 쏟아지는 낯선 이름과 수학적 용어에 당황하신 분들이라면 아래의 가이드를 꼭 읽어보면 좋겠다. 작중에서 언급되는 수학적인 개념을 전부 이해할 필요는 없다. 그런 지식이 없어도 큰 그림만 파악한다면 책의 재미를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나인폭스 갬빗』을 처음 읽는 독자를 위한 안내서 (1)[BY 동아시아] 『나인폭스 갬빗』을 처음 읽는 독자를 위한 안내서 (1) ~ ‘육두정부’와 ‘역법 역학’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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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SF 작가들을 통해서 SF에 입문한 터라 이렇게 본격적인 장편 스페이스 오페라를 읽은 건 처음이었다. 크고 장엄한 스케일의 세계관이 펼쳐지는 소설은 초등학생 때 읽었던 해리포터 시리즈, 황금 나침반, 율리시스 무어 정도가 전부였는데 그들마저도 배경이 우주는 아니었다. 「나인폭스 갬빗」은 <제국의 기계> 3부작의 첫 번째 책으로, 이단 세력에 맞서기 위해 위험한 도박을 택한 켈 체리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소설은 역법이 물리 법칙을 지배하는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서로 다른 역법을 믿으면 적용되는 물리 법칙이 달라지게 된다. 역법의 힘은 구성원들의 신뢰도에 영향을 받기에 육두 정부는 이단 세력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재 그들은 전략적 요충지인 요새를 이단들에게 점령당한 상태다. 이단 역법의 영향력 하에 놓인 요새에서는 육두 정부의 이능력 역법이 힘을 쓸 수 없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체리스는 그녀의 뛰어난 수학 능력과 기지를 눈여겨 본 이들에 의해 작전에 투입된다.
소설 속 세계는 많은 부분이 흥미롭다. 우선 작중에는 한국적인 정취가 조금씩 묻어난다. 작품에서 언급되는 식단은 상당히 한국적이다. 고사리 반찬, 양배추 절임이라고 번역된 김치, 식후 귤 같은 간식들까지. 또한 체리스는 이 작전을 성공으로 이끌기 위해 뛰어난 지략가이자 잔악한 학살자였던 제다오 장군의 영혼과 결합한다. 그가 속한 분파 슈오스의 문장이 여우인 것과 동시에, 우리에게는 익숙한 구미호가 제다오의 문장이었다. 내가 아는 우주를 배경으로 한 SF 작품들에는 한국은커녕 동양인이 등장이라도 하면, 그리고 그게 오리엔탈리즘을 강화하지나 않으면 다행인 수준이었는데 사소한 설정에서 익숙한 것들이 보이니 기분이 묘했다. 이걸 읽는 세계의 독자들은 신기했겠지?
그리고 진정한 우주 시대답게, 인물들의 행적이 성별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우주 전쟁을 배경으로 한 SF 작품에서 이렇게 많은 여성 인물이 등장해 호승심에 불타고 지략을 펼치며 활동하는 이야기는 많이 보지 못했다. 주인공 체리스는 여성이면서, 뛰어난 수학자이고, 자신이 속한 분파인 켈의 군대적 위계에 순응하고 충성하는 인물이다. 성별이분법적인 문법에서 탈피해서 인물 하나하나의 특성에 집중할 수 있는 이야기였기에 등장인물들의 매력이 한층 더 두드러졌다.
이제 겨우 1부의 이야기가 마무리 된 시점이기에 자세한 줄거리에 대한 설명은 조금 아껴두겠다. 하지만 1부의 끝에서 체리스가 보여준 성장이 2부와 3부에서 어떻게 이어질지 몹시 궁금하다. 처음 몇 장을 꿋꿋이 읽어나가다 보면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니, 이전과는 다른 스페이스 오페라에 매료되고 싶다면 꼭 한 번 읽어보기를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