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SF가 우릴 지켜줄 거야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은 김혜진 작가의 <깃털>이다. 표제작 '깃털', <SF8> 드라마 <간호중>의 원작 소설 'TRS가 돌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백화' 세 개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설정과 분위기가 가장 취향이었던 단편은 표제작인 '깃털'이지만, 소설 자체의 완결성은 'TRS가 돌보고 있습니다'가 가장 훌륭했다. 왜 이 작품이 드라마화 되었는지 바로 알 것 같았다. '백화'는 등장인물 사이의 관계성이 먹먹하고 애틋하게 다가왔지만, 그 아름다움과 별개로 짧은 분량 속에서 둘의 교감이 개연성 있게 그려졌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백화'는 그 앞과 그 뒤의 이야기, 그리고 생략된 그 사이의 행간을 길게 풀어낸 중장편의 글로 다시 한 번 읽고 싶다. 둘의 이야기를 긴 호흡으로 따라가고 싶은 아쉬움이 남는다.
'TRS가 돌보고 있습니다'는 읽은 뒤 마음이 한없이 술렁거리게 되는 이야기가 아닐까. TRS는 인간 보호자를 대신하여 중환자들의 곁을 지키는 간병인 로봇이다. 주인공 성한은 연명 치료 중인 노모를 둔 아들로, 길어지는 연명 치료에 점점 지쳐가고 있다. TRS는 이런 성한의 괴로움을 눈치 채고는 자신의 두 보호 대상인 성한의 어머니와 성한 사이에서 갈등한다. TRS가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그의 고민과 선택은 주제 넘은 교만이 되고, 치명적인 결함으로 치부된다. 그가 비인간이기 때문에 작중의 인간들은 TRS를 신나게 힐난하고, 부채감에서 벗어나 홀가분함을 만끽한다.
인간은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얼마든지 남을 이용하고 버릴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누구나 마주할 수 있는 윤리적 딜레마를 두고 작중 인물들은 자신이라면 절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거라며 마음껏 오만해진다. 이 이야기 속에서 가장 나쁘다고 비난받는 존재가, 당신들의 마음 속에는 없다고 당당하게 자신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