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써드」는 소개에서도 알 수 있듯 로봇이 인간을 몰아낸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SF 소설이다. 로봇들은 '인간은 실수를 반복하고 비효율적이다'는 이유로 인간을 도시에서 내쫓고, 그들만의 독자적인 사회를 구축한다. 주인공 요릿은 인간으로, 시골 마을에서 돼지치기로 일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요릿은 숲을 잘 알고 있다는 이유로 로봇 조사관 리처드의 안내자가 된다. 인간처럼 설계된 로봇 리처드와 로봇에게 적대적인 인간 소녀 요릿의 불편한 동행은 둘을 어떤 모험으로 이끈다.
책을 읽으면서 용감하고 따스한 마음을 가진 요릿의 행보를 따라가는 것도 재미있었지만, 초우싱지 할아버지의 말들이 무척 기억에 남았다. 위에 인용한 문장도 초우싱지 할아버지가 요릿에게 들려주었던 충고 중 하나다. 초우싱지 할아버지는 로봇에게 도시를 빼앗기기 전의 세상을 경험한 유일한 사람이자, 책을 기억하고 있는 마을의 이야기꾼이다. 초우싱지 할아버지는 요릿에게 자신이 읽었던 여러 소설 속 이야기를 들려준다. 비록 세월이 만든 기억의 공백 때문에 완전하지 못하지만, 초우싱지 할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는 요릿이 맞닥뜨린 위기를 헤쳐나가는 데 아주 큰 도움이 된다.
책 전체에서 로봇이 인간을 몰아내며 소설을 빼앗았다는 설정이 무척 인상 깊었다. 인간의 상상력에 의해 창조된 기계인간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다름 아닌 인간의 상상력 그 자체였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생각하는 힘, 창조의 원동력을 빼앗기 위해 그 산물인 소설을 인간으로부터 앗아간 것이다. 기계인간이 경계했던 인간의 상상력과 책은 이야기 속에서 그 힘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요릿이 닥터 프랑켄의 음모를 막아낼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초우싱지 할아버지가 들려준 '프랑켄슈타인'을 기억해 내서다.
하지만 책이 있었더라도 요릿의 따뜻한 마음이 없었다면 이야기는 아름다운 결말을 맞지 못했을 것이다. 요릿은 기계인간인 리처드를 좋은 친구로 받아들이고, 자신을 위협하고 죽이려 했던 괴물에게도 믿음과 선의를 건넨다. 요릿은 인간이 가진 가장 값진 것들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책을 읽는다면 당신은 사랑과 용기로 똘똘 뭉친 주인공 요릿의 기지를 열렬하게 응원하게 될 것이다.
세상의 끝에서도 책과 따뜻한 마음을 지켜야 하는 까닭에 대하여 용감한 주인공 요릿을 통해 이야기하는 청소년 SF 소설 「써드」! 어린이 친구들이 많이 읽어주었으면 좋겠다.
알아둬라, 요릿. 말은 속이 보이지 않는 항아리 같을 때가 있단다.
쓰는 사람에 따라 그 안에 담아 둔 의미가 아예 딴판일 때가 있거든. 그게 바로 말의 함정이다.- P115
너희 기계인간들은 툭하면 인간의 망상이 어쩌고 하면서 조롱하지?
너희가 망상이라 부르는 건 내가 모르는 것들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는 상상력이야.
이런 걸 무기로 사용했던 옛날 우리 조상님 때부터 이어진 선물이지.- P121
인간은 원래 비효율적이야. 가끔 내가 얻는 게 없더라도 지키고 싶은 게 있다고!- P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