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생물중심주의와 생물중심주의 원칙
<바이오센트리즘>, 로버트 란자/ 밥 버먼, 박세연 옮김, 예문아카이브
출판사 서평단 모집 공고를 보고 신청해서 이 책을 받은 지 8개월이 지났다. 이 책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이 책 읽기에 영향을 주기도 했지만, 기존의 과학 수준에 대한 지식이 일천하다는 것도 책 읽기에 부담을 주었다. 그래도 올해는 넘기지 말고 약속을 지켜야겠다는 각오로 의욕을 냈다.
생물중심주의에는 일곱 개의 원칙이 있다고 한다. 제1원칙 “우리가 생각하는 현실은 의식을 수반하는 과정이다.” 제2원칙 “내적 지각과 외부 세상은 서로 얽혀 있다. 둘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아서 따로 구분할 수 없다.” 제3원칙 “아원자를 비롯한 모든 입자와 사물의 움직임은 관찰자와 긴밀하게 얽혀 있다. 관찰자가 없을 때, 입자는 기껏해야 확률 파동이라는 미정된 상태로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제4원칙 “관찰자가 없을 때 ‘물질’은 확정되지 않은 확률 상태에 머물러 있다. 의식 이전에 우주는 오로지 확률로만 존재한다.” 5원칙 “생물중심주의를 통해서만 우주의 본질을 설명할 수 있다. 이러한 접근방식은 생명으로 인해 우주가 존재하게 되었다는 생각과 조화를 이룬다. 우주는 그 자체로 완벽한 시공간적 논리다.” 제6원칙 “시간은 생명체를 떠나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가 주변의 변화를 인식하기 위한 도구다.” 제7원칙 “공간도 실체가 아니다. 공간은 생명체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또 한 가지 도구이며 독립적 실체를 갖지 않는다. 거북이 등껍질처럼 우리는 언제나 공간과 시간의 개념을 이고 다닌다. 이러한 점에서 물리적 사건이 생명체와 무관하게 일어나기 위한 절대적이고 독립적인 공간이란 없다.”
글쓴이는 이런 원칙에 입각하여 현대 과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빅뱅의 시작에 대해 “우리의 마음 외부에 존재하는 ‘죽은’ 우주란 없다. ‘무’는 의미 없는 개념”이라 하고, 우주의 본질은 “생명에 기반을 둔 활동적인 과정”이라고 말한다.
7가지 원칙은 과학자들에게는 부실해보일지 몰라도 인문학을 전공한 내 입장에서는 특히 제1원칙과 제2원칙은 불교의 인식론과 아주 흡사해 보여서 이 원칙이 뭔가 그럴싸해 보인다. 불교에서는 육근(여섯 가지 감각기관), 육경(여섯 가지 감각기관에 해당하는 외부 세계), 육식(감각 기관과 외부 세계가 접촉해서 생기는 인식 작용)으로 나누어 인간의 인식 과정을 설명한다. 인간의 인식은 관찰자와 외부 세계가 결합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어서 관찰자 없는 외부 세계를 상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런 익숙함이 글쓴이의 논증에 타당성을 보증해주는 것은 아니다. 생물중심주의를 이런 원칙을 논증하는 글쓴이의 방법을 평가할 능력은 내게 없지만, 글쓴이가 용어를 사용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의견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생물중심주의’라는 용어에서, 생물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인간인지 동물까지인지 아니면 식물까지 포함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논증에 사용되는 여러 예시에서는 거의 인간의 경험으로 설명하고 있어서 인간중심주의와 같은 말인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굳이 생물이라고 한 데는 인간보다 더 넓은 범위의 생물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모든 관찰자라는 표현은 인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다음에 ‘생물중심주의의 원칙’에서 ‘원칙’이라는 용어를 왜 썼을까 의문이 든다. 원칙과 법칙을 유의어라고 하지만, 뉘앙스는 다르다. 원칙은 규범적인 일에, 법칙은 자연 현상에 쓴다. 자연 법칙이라고 하지 자연 원칙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생물중심주의’라는 용어가 자연 현상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 내지 철학적 입장처럼 보인다.
실제로 209쪽 기존 과학이 바라보는 우주를 설명하는 절에서 ‘근본적인 질문’이라고 제시한 문제들은 ‘사실’에 대한 질문이라기보다는 형이상학적인 질문에 가깝다. 빅뱅의 본질은 무엇인가. 의식의 본질은 무엇인가 등 ‘본질’이라는 표현이 특히 그렇다.
또 ‘중심’의 의미도 궁금하다. 보통 중심이라고 하면, 주변과 짝을 이루는 용어이다. 생물이 중심이라면 외부 세계는 주변이라는 뜻인가? 그렇다면 내부와 외부가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생물중심주의 원칙과 모순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관찰자 없는 외부 세계에 대한 관찰이 가능한가 하는 점에서 우주에 대한 글쓴이의 설명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지 질문하고 싶다.
책에 대한 의견을 정리하자면, 뭔가 익숙해서 호감도 가지만 궁금한 것도 많은 책이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