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길사에서 책을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하였습니다.
애초에 일기장을 산 것 자체가 실수였다. 그것도 아주 큰 실수.
P. 7
김지우 번역가님 북토크 때 귀띔해 주신 작품이라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어요. <나의 눈부신 친구>와 <잃어버린 사랑> (로스트 도터 영화 원작)의 저자 엘레나 페란테에게 영감을 준 작가의 작품이라고 한껏 기대감을 불어 넣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표지에 있는 검은색 일기장을 훔쳐보듯이 책의 첫 장을 펼치고 첫 문장을 읽습니다. 단번에 '잊을 수 없는 첫 문장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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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 데 세스페데스 Alba de Céspedes는 쿠바계 이탈리아 작가입니다. 『금지된 일기장』은 1952년도 작품이고 초역작입니다. 꽤 많은 작품을 썼고, 우리나라엔 『금지된 일기장』만 번역되었어요. 늦게 만나도 좋은 점은 이탈리아어 원전 번역이라는 거죠. 게다가 믿고 보는 김지우 번역가님이 번역해 주셔서 술술 읽힙니다. 읽다 보면 번역 작품이라는 것도 잊어버릴 정도예요.
『금지된 일기장』은 흡입력 있는 문체로 주인공 발레리아 코사티의 내면을 그려냅니다. 가제본이라 약 4분의 1 정도인 115쪽이지만 그 안에 담긴 발레리아의 감정과 생각은 무척 공감 가는 게 많아요. 배경인 국가만 다를 뿐이지 지금 우리가 부모님 세대와 겪는 가치관 차이, 역할 갈등과 크게 차이가 없습니다. 단지 그 중심이 자녀였던 시기에서 부모님의 입장으로 옮겨 갔을 뿐이죠.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이해하듯이 『금지된 일기장』을 지금 읽었기에 더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는 거 같아요. 불과 10-20년 전만 해도 저 같은 나이에는 주인공 발레리아처럼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워킹맘으로 살아갔을 테니까요. 내가 결혼을 했다면, 자녀가 있었다면 발레리아의 고민과 같은 고민을 하고, 같은 감정을 느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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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대 아티초크 가격이 너무 많이 올랐다는 이야기의 이면에는 전혀 다른 의미가 함의되어 있다. 어머니는 내 내면에 쌓인 피로를 인지한 것이다. (중략) 이제야 그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어쩌면 내게도 이해할 수 없는 딸이 생겨서인 것 같기도 하다. 대신 이제는 어머니를 이해할 수 있었다.
P. 74
가끔 엄마를 이해하는 순간을 경험합니다. 어린 나이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던 엄마의 행동과 말을 어느 순간 이해할 수 있게 돼요. 감사하기도 하고 왜 이제서야 할 수 있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는 순간이죠. 발레리아는 몰래 일기를 쓰며 이런 경험을 빠짐없이 담아둡니다. 자신이 고집스레 고수한 스스로의 모습에 의문을 품기도 하고, 남편에게 불만이 있다고 깨닫기도 하고, 자신의 가치관과 다른 딸의 행동에 화도 내고 이해하려고 노력도 합니다. 모두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내용이라 소설이 무척 현실감 있게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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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리아가 진정한 자신을 마주하는 부분이 정말 좋았어요. 사회에서 정해준 역할을 해내는 것에 몰두해서 자신을 제대로 마주할 수 없는 게 사실이니까요. 인지로 시작해서 고민하고 고뇌하는 발레리아가 어떤 선택을 할지 궁금합니다.
그러고 보니 이 집에는 나만을 위한 서랍이나 물건을 보관할 수 있는 공간이 하나도 없다. 이제부터라도 내 권리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P. 9
나와 미렐라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엄마인 나는 그런 투정을 할 권리조차 없다는 거다. 자식은 부모와 있는 것이 지겹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데, 왜 엄마는 자식이랑 있는 것이 지겹다고 하면 이상하게 생각하는 걸까?
P. 52
가제본이라 가장 중요할 때에 끝나서 정말 아쉬워요. 일기장을 산 것이 실수라고 시작하지만 삶에 큰 전환점을 맞이할 수 있을 거란 기대감이 있습니다. 엘레나 페란테의 작품세계에 영감을 준 작품이라 그런지 『금지된 일기장』에서 풍기는 묘한 공통점이 있는 거 같아요. 세계 2차 대전 직후 로마의 생활상과 몰락한 귀족, 중산층의 삶을 엿볼 수도 있고 여성의 사회 진출과 결혼 인식의 변화가 흥미롭네요. 빨리 책을 주문해서 남은 이야기를 마저 읽어야겠습니다. 시대를 뛰어넘는 알바 데 세스페데스의 날카로운 시선을 다른 독자분들도 경험하면 좋겠네요.
#문장수집
애초에 일기장을 산 것 자체가 실수였다. 그것도 아주 큰 실수.
P. 7
그러고 보니 이 집에는 나만을 위한 서랍이나 물건을 보관할 수 있는 공간이 하나도 없다. 이제부터라도 내 권리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P. 9
전에는 집에서 일어난 일을 곧바로 잊었는데, 일기를 쓰면서 일상을 기록하기 시작한 후부터는 우선 머릿속에 저장해놓았다가, 대체 왜 그런 일이 자꾸만 일어나는 건지 이유를 찾으려 한다. 일기장의 은밀한 존재는 내 삶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지만, 솔직히 그 덕분에 내 삶이 더 행복해지지는 않았다.
P. 30
어쩌면 휴식을 거부하는 나의 굳은 의지는 피곤이라는 행복의 원천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서 오는 두려움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P. 36
침묵 속에서 조금씩 지난 몇 년간 나와 친구들 사이에 생긴 거리감이 그들 중 내가 유일한 직장인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만 경제적인 필요를 자족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깨달음을 얻고 나니 마음이 평안해졌다. 전보다 자신감이 생겼다.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느낄 정도였다. 또래 친구들보다 왜 내가 성숙하게 느껴지는지 알 수 있었다.
P. 45
이제 무슨 일을 하든, 무슨 말을 하든 일기장의 존재가 느껴진다. (중략) 나는 항상 나의 삶을 하찮게 생각했다. (중략) 그런데 우연히 일기를 쓰기 시작한 후로, 사소한 말투나 단어 선택이 지금까지 중요하게 여겼던 일들만큼, 아니 때로는 그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P. 50
나와 미렐라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엄마인 나는 그런 투정을 할 권리조차 없다는 거다. 자식은 부모와 있는 것이 지겹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데, 왜 엄마는 자식이랑 있는 것이 지겹다고 하면 이상하게 생각하는 걸까?
P. 52
굳이 글로 남기지 않았더라면 대화 내용을 잊어버렸을 것이다. (중략) 망각하지 않으면 인간은 죄다 오점투성이의 존재라는 사실이 밝혀질 것이다.
P. 69
예컨대 아티초크 가격이 너무 많이 올랐다는 이야기의 이면에는 전혀 다른 의미가 함의되어 있다. 어머니는 내 내면에 쌓인 피로를 인지한 것이다. (중략) 이제야 그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어쩌면 내게도 이해할 수 없는 딸이 생겨서인 것 같기도 하다. 대신 이제는 어머니를 이해할 수 있었다.
P. 74
이렇게 늦은 시간에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은, 내가 결혼한 지 23년 만에 처음으로 나를 위해 시간을 쓰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P. 94
지갑에 돈이 있었지만 그래서 오히려 나 자신이 더 나약하게 느껴졌다. 그 돈으로 인해 우리의 빈곤을 측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나약함으로 인해 미렐라의 나약함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나의 무기력함으로 인해 미렐라의 무기력함을 느낄 수 있었다. 미렐라를 구원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 어쩌면 그애조차 자신을 구원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P. 96
솔직히 말하자면, 스무 살 때 나는 미렐라와 전혀 달랐던 것 같았다. (중략) 미켈레를 만나기 전부터,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그들은 내 소명이기 이전에 내 운명이었다. 나는 그저 내 운명을 믿고 따를 수밖에 없었다. 잘 생각해 보니 미렐라가 불안한 이유는 복종하지 않을 수 있는 선택권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그 선택원은 부모와 자식 관계, 남녀 관계를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P. 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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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이 집에는 나만을 위한 서랍이나 물건을 보관할 수 있는 공간이 하나도 없다. 이제부터라도 내 권리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P. 9- P9
전에는 집에서 일어난 일을 곧바로 잊었는데, 일기를 쓰면서 일상을 기록하기 시작한 후부터는 우선 머릿속에 저장해놓았다가, 대체 왜 그런 일이 자꾸만 일어나는 건지 이유를 찾으려 한다. 일기장의 은밀한 존재는 내 삶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지만, 솔직히 그 덕분에 내 삶이 더 행복해지지는 않았다.
P. 30- P30
침묵 속에서 조금씩 지난 몇 년간 나와 친구들 사이에 생긴 거리감이 그들 중 내가 유일한 직장인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만 경제적인 필요를 자족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깨달음을 얻고 나니 마음이 평안해졌다. 전보다 자신감이 생겼다.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느낄 정도였다. 또래 친구들보다 왜 내가 성숙하게 느껴지는지 알 수 있었다.
P. 45- P45
나와 미렐라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엄마인 나는 그런 투정을 할 권리조차 없다는 거다. 자식은 부모와 있는 것이 지겹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데, 왜 엄마는 자식이랑 있는 것이 지겹다고 하면 이상하게 생각하는 걸까?
P. 52- P52
굳이 글로 남기지 않았더라면 대화 내용을 잊어버렸을 것이다. (중략) 망각하지 않으면 인간은 죄다 오점투성이의 존재라는 사실이 밝혀질 것이다.
P. 69- P69
이렇게 늦은 시간에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은, 내가 결혼한 지 23년 만에 처음으로 나를 위해 시간을 쓰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P. 94- P94
지갑에 돈이 있었지만 그래서 오히려 나 자신이 더 나약하게 느껴졌다. 그 돈으로 인해 우리의 빈곤을 측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나약함으로 인해 미렐라의 나약함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나의 무기력함으로 인해 미렐라의 무기력함을 느낄 수 있었다. 미렐라를 구원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 어쩌면 그애조차 자신을 구원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P. 96- P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