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확자 시리즈, 그리고 피에르 르메트르의 오르부아르 시리즈까지 '열린책들'에서 출간된 작품들은 믿고 읽는 편이다. 단편 작품을 읽을 땐 부담이 없고 읽기 쉽지만, 가끔 너무 금방 끝나버려 내가 독자적으로 해석해야 하는 부분들(물론 그런 부분이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작품들도 있지만)이 있어 아쉬움이 남는다. 반면, 장편 작품은 책을 읽기 전에 오는 심리적 부담이 있지만 🙄 다 읽고 나면 작품에 등장한 세계에 잠시 살다 온 것 같은 깊은 몰입감이 남는 경우가 많다. 특히 '열린책들'에서 출간되는 책들은 실물을 보면 '앗....벽돌 🧱'이라는 말이 절로 나오고 과연 완독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지만 🫠 초반부를 넘기면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한 마음에 완독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녀를 지키다>는 수도원 지하에 숨겨져 누구도 볼 수 없게 되어버린 조각상 '피에타'에 대한 비밀을 풀어나가는 이야기이다. 마침 이 책을 읽기 직전에 <콘클라베>를 읽은 터라 배경지식이 조금 있어, 이해하기가 조금 더 수월했다. 사실 초반부는 무슨 이야기지? 싶은 부분들이 있어 속도가 조금 더뎠지만 점점 퍼즐이 맞춰지듯 연결되는 흐름이 좋았고, 인물들에 대한 애정이 생기면서 쭉쭉 읽어나갈 수 있었다.
이야기의 주인공인 미아와 비올라, 그리고 이들을 둘러싼 주변인들 모두 어딘가 하나씩 결핍이 있다. 전쟁의 상흔, 불우한 가정환경, 신체적 결함 등 각자가 가진 결핍과 상처들 때문에 이들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때로는 의지가 되어주기도 한다. 그 불완전성에서 현실성이 더해진 덕에, 이야기를 읽으면서 정말 이런 일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했다.
특히, 같은 여성으로서 책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미아보다는 비올라의 인생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구보다 영특하고 자신의 주관이 뚜렷함에도 불구하고 단지 여성, 딸이라는 이유로 오빠들처럼 정규교육을 받을 수도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한 선택을 할 수도 없었던 비올라. 미아의 인생에 비올라가 없었더라면, 미아는 조각가로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반면 비올라의 인생에 미아가 없었다면? 물론 비올라에게 몇 번의 위기가 찾아왔겠지만, 비올라는 기어이 언젠가 자신이 원하는 삶의 방향으로 움직였을 것이다. 주체적이고 지적인 인간이니까. 뭐 물론... 화자인 미아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접하다보니 비올라가 때로는 너무 완고하고 이기적으로 보여 답답할 때도 있었지만 😤 안정적인 삶을 두고 끊임없이 선택하고, 선택의 결과까지 껴안고 가는 비올라의 모습이 정말 인상깊었다.
미아의 입장에서는 미아가 그녀(비올라)를 지켰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피에타 조각상을 만들고 지키는 것은 인정), 비올라 또한 미아가 자신을 지켜주고 있다고 생각했을까? 물론 친구 이상, 연인 이하의 어떤 미묘한 관계에서 미아의 존재가 비올라에게 많은 의지와 도움이 되었을 수는 있겠지만, 비올라를 지켜낸 건 바로 비올라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다. 언젠가 이 책의 내용이 드라마나 영화로 제작되더라도 너무 좋을 것 같다. 그럼 꼭 챙겨봐야지 ☺️
42쪽_ 하지만 나는 불행하지 않았다. 살아오는 내내 바뀌었으며 나중에는 오페라 가수들과 축구 선수들까지도 포함하게 될 나만의 우상들을 모신 만신전에 기도를 올리면서 저녁마다 그 사실을 확인했다. 어쩌면 내가 젊었고, 나의 하루하루가 아름다워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한낮의 아름다움이 밤의 예지에 무엇을 빚지고 있는지, 나는 오늘에서야 헤아린다.
92쪽_ 전쟁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죽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해? 길가에 매복하는 사람들이? 너를 강간하고 네게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이? 죽은 사람들은 우리 친구들이야. 산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게 더 나을걸.
199쪽_ 아니야, 미모. 나는 네게 한계가 없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어. 위로도 아래로도, 큰 걸로도 작은 걸로도. 모든 경계는 만들어 낸 거야. 그 점을 이해한 사람들은 그걸, 그런 경계를 만들어 낸 사람들을 몹시 불편하게 하고, 나아가 그걸 믿는 사람들은 더욱더 불편하게 만들기 마련이야. 그러니까 거의 모두가 불편해진다고 할 수 있어. 마을 사람들이 나에 대해 뭐라고 하는지 알아. 내 가족조차 나를 이상하게 여기는 것도 알고. 난 상관 안 해. 모두가 네게 반대하면 네가 올바른 길에 들어선 것임을 알게 될 거야.
228쪽_ 당시는 역사가 아주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이 역사 역시 몇 거리 떨어진 곳에서 바다가 시작되는 만큼 더더욱 아름다웠다. 4년 전만 해도 지중해는 내겐 넓게 펼쳐진 파란 물이었다. 비올라 덕분에 이제는 바다가 점선으로 표시된 해로들로 덮이고 생명을 주고 생명을 앗아 가고 돌풍과 지진을 품게 됐는데, 비올라는 지진의 강도를 표시한 그 유명한 메르칼리 진도의 12등급을 암기할 수 있었다. 비올라는 아르바시아 릭술라와 트립네우스테스 벤트리코수스의 차이를 알았다. 「검은색 성게와 흰색 성게야, 바보야.」
257쪽_ 「왜 네리가 좋은 반장인 줄 아니? 안정적이어서란다. 그 애는 거기에 두 발을 딛고 서 있고, 자신이 뭘 하는지 잘 알지.」
「하지만 결코 더 멀리는 못 갈 겁니다.」
「맞아. 그 애는 벽에 도달했어. 하지만 벽의 이점, 그건 거기 기댈 수 있다는 거지. 너, 반면에 넌, 내리막길에서 가속도가 붙은 사람처럼 숨이 턱에 차서 내달리지. 단지 너의 내리막길은 오르막길인 게 다를 뿐.」
594쪽_ 아니야, 미모. 그 말이 맞아. 내 평생, 정상적이기 위해서 네가 필요했어. 그런 노력을 할 때 넌 내 구심점 노릇을 하니까. 그래서 네가 늘 유쾌한 존재일 수는 없는 거지. 하지만 내 안에는 아무리 너라도 절대 고치지 못할 비정상성이 있어. 그건 내가 여자이기 때문이고 그 점에 관한 한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