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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실님의 서재
  • 삶과 운명 1
  • 바실리 그로스만
  • 15,750원 (10%870)
  • 2024-06-28
  • : 2,830

‘독서’라는 행위가 내게 주는 즐거움 중 하나는 바로 세계의 확장이다. 책에 쓰인 내용으로 새롭게 알게되는 것들도 있지만, 어떤 책들은 내용을 더 잘 이해하고 싶은 욕심을 불러일으켜 보다 적극적인 독서를 하게 만든다. 바실리 그로스만의 <삶과 운명> 3부작 역시 그랬다. <삶과 운명>은 종군기자였던 바실리 그로스만이, 독소 전쟁이 벌어지는 혼란 속에서 사람들이 겪을 수 있는 온갖 고난들과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가치는 무엇인지에 대해 사실적으로 다룬 이야기이다. 특히 소련인들의 입장에서 주로 이야기가 전개되다보니,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라든지 스탈린 치하의 독재와 같은 이념과 정치를 다루고 있고 수많은 실존 인물들이 등장하다보니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사실 처음에는 부족한 배경지식과 낯선 인명과 지명 때문에 집중이 잘 되지 않아 이 책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정말 자주 들었다. 아마 도서관에서 빌려왔더라면, 진작에 반납했을지도 🫠 그러나 페이지를 넘기면 넘길수록, 이야기에 빠져들게 되었고 이들의 삶을 더욱 더 잘 이해하고 싶어 기꺼운 마음으로 도움이 될 만한 자료를 찾아가며 독서를 했다.  이 과정을 통해 <삶과 운명> 속 인물들의 삶을 한발짝 더 다가가 공감할 수 있었고, 독소전쟁 당시의 상황에 대한 공부까지 할 수 있었다(럭키비키 🍀). 



고통과 즐거움 속에서 20일 가량 <삶과 운명> 속 세계에 빠져들어 지내면서, 전쟁 그리고 이념이 평범하게 살아가는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생생하게 느꼈다. 특히 기억에 남는 부분 중 하나는 전쟁, 그리고 유대인에게 가해진 공포스러운 상황에서도 일상적인 삶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실, 전쟁을 직접 겪어보지 않은 입장에서 막연히 상황을 상상해보면 전쟁 자체로 파괴된 일상, 지난한 피난이나 고통, 피할 수 없는 죽음 같은 것들이 떠오르지 않는가. 게다가 수용소 마을에 감금되었다면,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 하루하루 피폐해질 것만 같다. 그러나 1부에서 안나 세묘노브나가 자신의 아들에게 쓴 편지를 보면서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독일인들은 점령한 소련의 도시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을 학살하기 위해 게토로 강제 이주를 시키고, 안나 역시 게토로 이주하게 된다. 안나는 편지에서 자신을 비롯한 유대인들의 삶을 자세하게 이야기한다. 모두 마음 한켠에 언제 죽을지 모르는 두려움을 갖고 있지만 그 안에서도 어떤 ‘희망’을 갖고 살아간다고. 게토 안에서도 그들은 의사, 난로공, 미용사로서의 직업을 이어가며 일을 하고 누군가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 냉정하게 보면 아마 음악가도, 제화공도, 재단사도 그 어떤 직업도 미래도 가지지 못할 어린 아이들은 그곳에서도 학교를 다닌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도 ‘나’를 유지하고 지킬 수 있는 그 마음은 어떤 것일까. ‘희망이란 거의 언제나 이성과 상관없는 부조리한 것이라는 사실을 난 여기서 알았다. 희망을 낳는 것은 본능이라는 사실도(124p).'라는 안나의 말처럼, 누군가에게는 비논리적이고 허황되어 보이는 희망이 또 누군가에게는 삶을 이어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고 인간에게는 그런 힘이 늘 숨겨져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광복절, 본능적으로 희망을 찾아 치열하게 싸워주신 분들 덕분에 나는 시원한 방에 앉아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비슷한 시기에 쓰였던 자들의 희망에 감응할 수 있는 게 아닌가.


2부와 3부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인간의 ’선의‘에 대한 이야기였다. 서로를 증오하며 상대를 죽여야만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전쟁의 시대에도 남아있는 ’선의‘. 자신의 가족을 죽인 독일 군인이 위험한 상황에 처해있을 때, 기회를 틈타 그를 죽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살릴 수 있는 선택을 하게 되는 마음. 명백한 악의를 선택해야만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음에도, 또는 양심을 버리면 보다 더 편하게 살 수 있음에도 먼길을 돌아가는 그 마음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극한의 상황에서도 그런 고민을 하고 어려운 선택을 하는 인물들을 보며 생각이 많아졌다. 


<삶과 운명>이 읽기 쉽고 편한 책은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정말 어렵고 부담스러운 책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1권을 다 읽고 나면 나머지 2,3권은 읽지 않을 수 없는 매력이 넘치는 책이다. 독소전쟁이 배경이지만, 어쨌든 잦은 전쟁과 정치적인 신념으로 탄압 받은 이들이 많은 우리나라 사회를 떠올린다면 시대적 배경도 물리적 배경도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런 게 바로 이야기가 주는 힘 아닐까! 올해 읽은 책 중 가장 뿌듯하고 보람있던 시리즈로 인정한다. 


+ 이 책을 만약 읽는다면, 초반에는 인물도를 그리거나 짤막한 메모를 하며 읽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 러시아식 이름이 익숙하지 않은데 한 인물이 등장할 때 어쩔 때는 풀네임으로 또 애칭으로 혹은 이름이 나올 때가 있어서 정말 헷갈렸다. 물론 저자의 의도나 대화 속 인물들 간의 관계를 최대한 살리기 위한 번역이었겠지만, 읽는 입장에서는 아쉬움이 좀 남는다. 



희망이란 거의 언제나 이성과 상관없는 부조리한 것이라는 사실을 난 여기서 알았다. 희망을 낳는 것은 본능이라는 사실도. -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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