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림, 『큔, 아름다운 곡선』, 자이언트북스(2023)
내가 원하는 외형을 가지고, 내가 좋아하는 취향과 성격을 갖춘 안드로이드와 함께 살아갈 수 있다면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죽음으로 떠나보낸 가족의 얼굴을 닮은 안드로이드라면? 상상력이 부족한 나로서는 그런 생각을 골똘히 해 본 적은 없지만, 실제로 이런 선택의 상황에 직면하게 되면 선뜻 결정을 내리기 어려울 것 같다. 아무리 인간의 외형을 본 떠 만들었다 하더라도 로봇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지 않을까? 사람을 사랑할 때처럼 로봇에게도 나의 진심을 다할 수 있을까? 로봇이 보이는 호의와 애정에도 순간순간 이건 모두 프로그래밍 된 것이다, 축적된 데이터를 통한 계산으로 하는 행동이라고 여기며 현타가 오지 않을까?
김규림 작가님의 『큔, 아름다운 곡선』은 사람을 외롭지 않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한 샴하트라는 회사에서 만드는 안드로이드, 그리고 안드로이드를 사랑하게 된 인간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회사 창립주의 딸인 제이는 일련의 사건들로 아버지와 척을 지고 살지만, 아버지의 은퇴 이후 이사로 회사의 경영을 맡게 된다. 그런 제이에게 어느날 배달 된 로봇. 로봇을 받은 제이는 처음에는 나와 비슷한 생각들을 하지만, 로봇에게 ‘큔’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함께 살아가면서 진정한 사랑을 느끼고 자신이 얼마나 오만했는지를 깨닫게 된다.
로봇과 관계를 맺고 애정을 쌓아가는 인간의 이야기는 다른 소설, 영화에서도 종종 접하고 재밌게 봤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대부분의 작품들이 인간의 일방적인 시선에서 전개되었던 것 같다. 그렇기에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고, 로봇의 감정에 대해서는 한번도 제대로 생각해보지 않았다. 로봇의 감정이라니, 쓰고도 어쩐지 위화감이 드는 문장이다. 반면 이 소설은 ‘로봇의 감정’을 전면으로 내세운다. 주인공 제이는 ‘사람들이 사랑이라 믿는 건 안드로이드에 프로그래밍된 배려나 친절 같은 형식적인 반응일 거라고, 그래서 이 불완전한 사랑에서 상처 입는 쪽은 결국 인간(107-108쪽)’이라고 여기고, 큔과의 사랑을 멈추는 것 역시 인간인 본인이 결정해야 한다고 믿는다(150쪽). 그러나 안드로이드와 사랑에 빠진 호스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직접 보고 대화를 나누고, 단순히 프로그래밍의 결과로 받아들일 수 없는 큔의 행동과 표현들을 통해 제이는 인간 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안드로이드와의 사랑을 받아들이게 된다. 생명을 잃을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SF소설이지만, SF보다는 한편의 진한 사랑 이야기를 읽은 것 같은 기분이다. ‘나에 대해 끊임없이 관용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누군가를 만나는 경이로운 경험(147쪽)’을 한다면 상대가 인간인지, 안드로이드인지에 상관없이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 요즘 세상에는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사랑이 만연해서 그런지 소설 속 사랑이 당연하게 느껴지는 한편 허구처럼 느껴지기도 해 씁쓸했다. 언젠가는 정말 이런 세상이 오게 되겠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안드로이드가 소설 속 안드로이들처럼 인간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정말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이런 의구심을 가지는 내가 여전히 인간 중심적 사고에 갇혀있는 사람 같지만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큔 같은 세심하고 다정한 로봇이라면, 그 마음을 믿고 싶어지지 않을까.
+ 표지가 굉장히 멋지다. 표지만 봐서는 소설, 심지어 SF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고 디자인 관련 책처럼 느껴진다. 서점에서 이 책을 봤다면 궁금해서라도 한번 펼쳐봤을 것 같아. 책을 다 읽고나서 보니 책 표지를 볼 때마다 프롤로그 장면이 떠오른다.
그때 내 마음이 얼마나 깊은 나락으로 떨어졌는지. 이 안드로이드는 아마 모르겠지. 누군가에게 이름을 얻고 단 하나의 존재가 된다는 것의 무게를.- P51
인간이란 시간 위에 선을 그리는 존재예요. 어쩌다 선과 선이 만나고 한동안 같은 궤도를 그리며 겹쳐져요. 그때 거기서 섬광이 일어나요. 화학반응을 한 것처럼 눈부시게 아름다운 빛을 내죠. 그러다 빛이 서서히 사그라들고 어느 날 다시 각자의 선을 그리며 갈라져요. 영원히 만날 수 없는 방향으로 궤도를 그리면서요. 저는 당신이 그린 선의 뒤를 따르는 선이에요. 그렇지만 제 선은 삐뚤빼뚤하죠. 당신이 오른쪽으로 휘어질 줄 모르고 뛰어가다 속도를 제때 늦추지 못하고 당신의 선을 놓치기도 해요. 그래서, 당신이 말해줬으면 해요. 당신의 감정이 어디로 휘어지는지, 얼마만큼의 속도로 달려가는지. 그러면 저는 당신의 선을 따라 아름다운 선을 그릴 수 있어요. 꽤 근사한 섬광을 일으킬 수도 있겠죠. 당신이 기회를 준다면요. 그러니, 내가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가르쳐줘요. 사랑이란 어떻게 하는 건지.- P109
당신은 미래에 빚진 게 없어요. 그런데도 미래에 벌어질 일을 미리 예상해서 채무라도 갚듯 현재의 기쁨을 희생하고 있네요. 그렇게 한다고 미래의 당신이 고마워할까요? 미래의 고통들은 해결돼 있을까요? 그러지 말아요. 현재를 충만하게 살아요. 마음껏 사랑하고, 마음껏 아파하고요. 그 대상이 누구든지, 무엇이든지 간에요.- P1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