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수야 있나. 천천히 올라갔다 오지 뭐. 이놈의 비가 대신 그쳐 주면 더 바랄 게 없지만 말이야.”
이야기는 롤랑 거리 6번가에 있는 기묘한 저택의 현관을 밟으며 시작된다. 낮은 건물들 사이 혼자 솟아있는 7층 저택의 각 층엔 보기 드문 독특한 인물들이 살고 있다. 저택의 3층에 살고 있는 다정하고 성실한 바리스타 라벨은 그들 중 가장 정상적으로 보인다. 그런 라벨에게도 특별한 능력이 있는데, 바로 소원을 이뤄 주는 것이다.
1층의 박제사를 시작으로 가난한 시인, 백작가의 하인, 죽음을 앞둔 두 노인들과 유명 의사까지. 라벨에게 소원을 말한 이들은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한다. 사건 현장마다 출몰하는 자칭 탐미 공작은 누구이며 라벨과는 어떤 관계일까. 보이드 씨는 대체 무엇을 하기에 기묘한 사건들이 벌어져도 자신의 방을 벗어나지 않는 것인가. 라벨은 왜 사람들이 자신에게 소원을 말하지 않길 바라는가.
“그는 단지 높은 곳에서 모든 걸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은 작가의 책은 처음인데 생각보다 감성적이어서 놀랐다. 고딕 장르 형식을 충실하게 따랐으나 대사나 소재 선택에 있어 한국적인 요소들이 잘 보여 재밌었다. 특히 2000년대 특유의 낭만적인 감성이 돋보였다. 분량이 꽤 되지만 대사와 서술의 적절한 분배, 옴니버스식 전개로 막힘없이 술술 읽었다. 잔혹해서 아름다운 고딕 로맨스를 즐기고 싶은 사람이라면 두 말할 것 없이 이 책을 추천한다.
이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