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시마 유키오의 장편 시리즈 ’풍요의 바다‘ 3권 <새벽의 사원>. 관능적인 에너지가 느껴져 <봄눈>(1권), <달리는 말>(2권)보다 그의 다른 작품들(<오후의 예항>, <짐승들의 유희>, 그리고 아마 <금각사>)이 떠오른다. 물론 시리즈에 요구되는 유기적 연결성이나 이야기의 총체적인 진행이 이전 소설보다 더 뚜렷해져서, 소설의 초반부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더 집중해서 읽을 수 있었다. 문장이 훌륭한 건 말할 것도 없다.
이전 이야기와 달리 불교적 색채와 회의주의적인 분위기가 강한데, 그건 ’환생자(기요아키-1권, 이사오-2권)‘를 바라보는 ‘인식자’에 불과했던 ‘혼다’가 중년에 이르러 소설의 완전한 초점 화자로 등장하고, 이국의 공주로 태어난 환생자가 혼다에게 타자처럼 멀어지기 때문일 것이다(여기서 타자는 비판적으로 말하자면 대상화, 작가만의 미학적 관점으로 말하자면 절대화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성’을 믿던 혼다, 그러나 환생자로 인해 이성의 균열을 느끼고 ’감성‘과 ’순수‘의 본질, ‘윤회 사상’의 의미에 대해 천착하지 않을 수 없었던 혼다는 이사오의 죽음 후 십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출장 차 태국에 방문했다가 자신이 이사오의 환생자라 주장하는 일곱 살 태국 공주 ‘잉 찬’을 만난다.
역사에 관여하려는 의지야말로 인간의 본질이라 믿는 혼다, 그래서 환생자들이 시대에 맞서 보였던 태도(불가능에 매혹당한 감성의 기요아키와, 극도의 순수를 추구해 행동으로 보인 이사오)와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지금의 혼란을 비교하며 역사와 환생에 대해 곱씹던 혼다에게 환생자가 넙죽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이 너무 쉽게 성사된 만남은 어떤 뚜렷한 결과 없이 끝난다. 공주가 너무나 어리기 때문이기도 하고, 우연찮게 얼핏 본 잉 찬의 알몸에서 환생자의 증표와도 같은 왼쪽 옆구리의 점 세 개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사오를 통해 환생의 존재를 알아버린 지금 시점에서 도대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무엇을 도모하고 추구할 수 있을까?
일을 해결한 혼다는 인도로 넘어가 바라나시와 갠지스강 유역의 힌두교 사원, 그리고 인도에서 오래전 추방된 불교의 성지 아잔타 동굴 유적을 방문한다.
죽음에조차 무관심한 듯한 사람들, 죽은 듯이 보이나 살아있는 사람, 강 앞에서 시체를 화장하는 사원 불 등 삶과 죽음이 한 들판을 이루고 있는 세계 같은 갠지스강 유역의 분위기는 혼다에게 감성과 이성 너머, 윤회라는 ‘초이성’의 존재를 공포스럽게 실감하게 하는 체험이 된다.
반면 불교 성지인 아잔타 석굴에서 혼다는 친근감을 느끼며 그 마지막에 만난 폭포에서는 이사오가 기요아키의 환생임을 깨달았던 미와산의 삼강 폭포, 기요아키가 죽기 전 언급했던 폭포를 떠올린다(이후 혼다가 ‘야뢰야식’의 실체를 깨달을 때도).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자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다. 나라는 격랑에 휩싸이는데, 혼다는 그때부터 서재에 박혀 본격적으로 윤회사상을 탐구하기 시작한다.
윤회의 목격자인 혼다의 의문은 하나다. 불교는 자아와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윤회 사상에 관계된 ‘업’ 사상을 계승해서 인과적인 윤회(선에는 선업, 악에는 악업을 주는 식의)가 이루어진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윤회의 주체는 누구인가.
디오니소스, 오르페우스 이야기부터 인도 설화까지, 기나긴 탐구와 성찰 끝에 혼다는 불교의 모순을 그대로 안고 간 소승불교에 ‘종자훈습’ 개념을 제시해 철학적 결실을 맺은 대승불교의 ‘유식론’에다가, ‘무아의 흐름’이라 할 수 있는 ‘야뢰야식’이라는 궁극적 의식을 설정해 앞선 수수께끼를 푼다. 야뢰야식이 윤회환생의 주체이며 그것이 생사를 윤회하는데, 인과의 방식보다는 시간과 공간이 동시에 맞닿은 듯 동시공적으로 현현한다. 야뢰야식은 그 의식의 거처인 ‘세계’와 존재적으로 상호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이는 현재가 순간순간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폐기되는 폭포의 모습과 같다. 그런 흐름 속에서 ‘깨달음’이 발생하여 윤회는(그리고 세계는) 의미를 가지게 된다. 혼다는 이렇게 초이성의 실체를 도출한다.
여기까지가 1부의 내용인데, 2부는 이와 또 다르게 다르게, 말하자면 ‘의아하게’ 전개된다.
전쟁이 끝난 뒤 혼다는 1900년대 초부터 진행되던 한 소송에서 쉽게 승소해 변호사로서 거액의 돈을 얻고 별장을 꾸린다. 바란 적 없던 우연한 기회로 삶의 안정이 확보된 것이다. 이는 패전한 뒤 연합군이 주둔하고 일왕이 힘을 잃는 일본의 모습과 대비되는데, 뒤로 갈수록 이러한-나라 현실과 혼다의 삶의 대비-는 극대화된다.
별장에서는 일본 정신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후지산’이 뚜렷이 보인다. 후지산은 혼다의 기억 속 태국의 새벽의 사원, 인도의 갠지스강 유역의 사원과 묘하게 겹쳐진다. 신성한 대상이 건축물에서 자연물로 바뀌면서 혼다에게는 때아닌 쾌락, 욕망의 충동이 일기 시작한다.
그건 나이가 들어 불가능이 확정된 그에게 환영처럼 솟아난, 불가능을 쫓고자 하는 쾌락이다. 세속적인 쾌락, 지적인 쾌락 등 다양한 쾌락 중에서 혼다는 불가능한 쾌락을 꿈꾸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대상은 열여덟 살이 되어 일본에 유학을 온 월광 공주 ‘잉 찬’이다.
친구, 서생의 아들로 모습을 드러냈던 윤회자에게 어떻게 이런 마음을 품을 수 있을까 싶어 의아하다.
기요아키와 이사오의 경우, 혼다가 그들이 가고자 하는 길(죽음)을 막지 못했기 때문에, 이번엔 애초부터 윤회자와 거리를 두고 허무에 대비해 이런 욕망을 발명해둔 게 아닐까 싶다. 윤회자의 입장으로 전개되던 이야기가 윤회 주체를 타자화하고 윤회의 목격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로 바뀐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아마) 윤회를 못하는 인간이기에 이런 식으로 목격할 수밖에 없는 거라고.
그는 한껏 아름다워진 잉 찬에게 그 세 개의 점이 있는지를 다시 확인하고 싶어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이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을 도우면서 동시에 방해하기 때문이다(이렇듯 혼다가 천착하던 윤회는 혼다에게 어느새 걸림돌이자 디딤돌이 되어 있다).
욕망에 눈 뜬 혼다. 당혹스럽긴 하나, 사실 혼다가 쾌락을 추구할 거라는 징조는 소설 여기저기에 드러나 있다. 이성의 문지기로서 법을 수호하던 그는 소설 초반에 법의 규제에 인간성의 장난이 있다고 통찰하기 하고, 자신이 그 어떤 물질도 쥐어본 적 없다는 걸 사뭇 깨닫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변 인물들이 탐미적인 예술가들(히시카와, 쓰바키하라 부인, 이마니시, 마키코)이고 또 그런 호칭에 걸맞은 행동들(불륜, 관음)을 보여서 혼다가 영향을 받은 것도 같다.
혼다는 잉 찬 자신이 모르게 잉 찬을 관찰함으로써 그 세 점의 존재 여부를 알고 싶어 한다. 몸서리쳐질 정도로 관음증적인데, 그런 데엔 또 이유가 있다. 그런 관음의 형식이야말로 초이성적인 쾌락에 가깝기 때문이다. 미시마 유키오 특유의 탐미주의가 윤회, 불교와 결합하는 순간이다.
혼다는 인식자라는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고 이런 욕망을 설계한 뒤로부턴 잉 찬의 부재를 즐기기도 하고 일부러 거리를 두기도 한다. 다데시나로부터 받은 서적에서 본 공작명왕의 이미지를 잉 찬에게 대입하기도 한다. 다만 1대 월광 공주의 반지를 잉 찬(2대 공주)에게 끼게 해 그녀와 ‘연결’돼 있고 싶어한다. 그건 반지가 그 둘 다 이 세계에 존재함(한쪽은 윤회를 거쳐)을 증명하는 도구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이 가능성을 향해서 치열하게 달려가는 질주라면, 치열하게 가능성으로부터 멀어짐으로써 불가능성에 닿으려하는 혼다의 사랑, 그 불가능을 완성하고 보존하려는 사랑은 사랑보다 훨씬 더 비현실적인 이름이 필요할 것이다. 그것은 윤회다. 혼다는 잉 찬을 욕망하고 그를 통해 소유할 수 없는 윤회를 욕망하는 걸지도 모른다.
이런 욕망을 예민하게 알아챈 이웃 주민 게이코, 잉 찬이 유일하게 의지하는 게이코를 통해 혼다는 이 욕망을 성취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 욕망은 애초에 불가능을 전제하고 있다. 불가능을 꺼뜨리는 순간 불가능을 포함해 모든 가능마저 무너지는 모순. 결국 이 욕망은 실현되면 그가 원했던 것과 달리 세속적인 쾌락으로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물론 그렇게 수준이 격하되는 쾌락에도 혼다는 유혹을 느끼는 듯하다, 워낙에 완벽을 일구며 살아왔기 때문에).
그런 모순은 잔인하게도 ‘자살’로서만 극복할 수 있다고 혼다는 생각한다. 인식의 촛불이 꺼져가는 순간에야 진정한 어둠을 볼 수 있는데, 애초에 인간이 그 촛불 자체이기 때문이다. 의식과 세계라는 상호의존에서 육체는 가장 먼저 버려질 껍데기다. 그리고 인간은 너무나 껍데기다. 혼다는 이런 사실을 알고서, 나른하게 앉아 그 불가능이 성사되는 지고지순한 행복을 꿈꾸기만 할 뿐이다.
하지만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결국 혼다는 구멍 엿보기를 시작하나, 잉 찬이 게이코와 동침하면서 왼쪽 옆구리의 세 점을 드러내 혼다를 배반해버린다(잉 찬은 자신이 혼다를 배반한 것조차 모르겠지만).
결국 혼다에겐 초이성적인 쾌락만큼이나 초이성적인 허무가 남는다(혼다를 집요하게 의심하던 혼다의 아내 리에에게도). 그리고 그런 허무를 세상에 내보이듯, 혼다가 꾸었던 기나긴 황금빛 꿈에 대한 미학적인 완결이 치러진다. 사원 화장장의 불타는 모습이 갠지스 강물에 비치는 것처럼, 불타오르는 혼다의 별장이 수영장 물에 비친다. 새벽에 이르러서야 나라의 현실과 혼다의 삶이 드디어 일치를 이룬다.
한 시대의 종말, 거대한 저녁노을을 상징하던 예술은 새벽까지 미뤄져, 점점 눈에 띄는 빛으로 어둠에 가려져 있던 세상의 모든 종말, 초이성의 허무를 반사하기 시작한다.
새벽에 달이 순식간에 사라지듯 잉 찬의 삶도 소설의 말미에 짧게 끝나버린다. 윤회조차도 그렇게 멀어지고 덧없어지는 것일까.
이제 마지막 <천인오쇠>만이 남는다. 여기선 혼다가 어떤 모습을 보일지, 또한 환생자가 어떻게 나타날지 예상이 가지 않아 더욱 기대된다. 앞선 소설마다 다음 환생에 대한 예언이 나왔는데 이번 소설에선 그런 예언조차 없기 때문이다. 잉 찬의 죽음을 여기선 짧게 처리한 대신 <달리는 말>에 미리 이사오의 꿈으로 상세히 서술해둔 것도 윤회가 점점 인식자에게서 멀어지고 있다는 것처럼 느껴져서 인상적이다. 저번 소설보다 어려워진 듯하나 이것이 미시마 유키오가 하고자 하는 말인 듯 느껴져서 그 어려움조차 면밀히 들여다보면서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