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선생님의 초기작 <휘청거리는 오후>. 제목도 제목이지만 우연히 본 결말부의 문장이 박완서 선생님이 이렇게 날카롭기도 하다니, 싶을 정도로 인상 적이어서 무슨 내용일지 무척 궁금했다. 그런데 읽어보니 이런 작품을 두고 고전, 걸작이라고 말하는 거구나 싶을 정도로 감정이 벅차오른다.
<휘청거리는 오후>는 세 딸을 결혼시키며 몰락하는 중산층, 허성 씨 가족의 이야기다.
주요하게 등장하는 세 자매-맞선이 좌절된 뒤 부자에게 시집가고 싶어 중매시장에 자신을 내놓다시피 하는 ‘초희’, 오랜 연인인 민수와 결혼을 꿈꾸다가 일부터 저지르고 본 ‘우희’, 친구의 애인을 뺏어가면서까지 욕망에 휩싸이다 남자의 추악한 실체를 목도한 뒤 결별하고 우연히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된 ‘말희’-는 결혼으로 사회적 신분 상승과 환경의 안정, 행복을 꿈꾸는 여성들이다.
선생 일을 그만두고 사업을 맡게 되었다가 겨우 안정에 달한 허성씨는 양심만은 끔찍이 지키려는 태도를 가지고 결혼에 눈이 먼 듯 속물적으로 행동하는 딸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도, 사랑에 겨운 나머지 그들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게 아낌없이 지원해주고 싶어한다(그건 아내인 민 여사도 마찬가지인데, 사업이 잘 굴러가지 않는 상황에서도 돈이 필요하다고 그렇게도 남편을 닦달해서 미워질 것 같으면서도, 허성 씨와 마찬가지로 딸들을 끔찍이 위하는 게 느껴져 감히 미워할 수가 없다).
그러나 결혼 후에야 발톱을 드러내는 현실(특히 남편들의 돌변은 사기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치가 떨린다)은 여성들이 결혼을 통해 이루고 싶은 욕망뿐만 아니라 육친애처럼 희구했던 사소한 행복마저 좌절시킨다. 진저리가 날 정도로 깊이 깊이. 잎과 줄기 뿐만 아니라 뿌리까지, 심긴 땅까지 전부 병들게 한다. 허성 씨가 딸들에게 내어준 새로운 삶은 모두 무너지고, 결국 허성 씨의 삶도 마치 도미노의 연쇄작용처럼 무너지고 만다.
이러한 비극에 가닿기까지 허성 씨의 무력하면서도 친근한, 시대에 뒤쳐진 듯하면서도 그런 혼란 속에서 시대를 날카롭게 진단하는 시선이 제일 좋았지만(물론 그는 1970년대 가장으로, 아내에게 손찌검을 하기도 했던 가부장적인 인물이다), 다른 인물들-민 여사, 세 딸, 공 회장, 민우, 정훈, 문경하, 오지경 씨, 문기범 씨, 윤 영감, 중매쟁이, 차 씨, 김상기-의 시선도 모두 그 인물의 성격을 생생히 드러내고도 남아 좋았다. 모두에게 공감이 가면서도 모두에게 징그러움을 느끼기도 했다. 인간이란 바로 그런 존재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소설은 모든 인물의 선의와 욕망을 전부 보여주고 있다. 옷을 전부 갖춰입고 화장까지 했는데도 오장육부까지 들여다보고 말하는 듯한, 소설 속 중매쟁이의 시선으로 쓰인 소설 같다.
인물들은 자신의 무형의 욕망을 결혼 풍습에 의탁한다. 공고히 이어져 온 제도가 욕망을 실현시켜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도는 한쪽이 마음만 먹으면 과감히 그 약속을 져버리거나 상대를 속일 수도 있는, 허위적이고 기만적인 장난이 되기 쉽다. 더 나은 삶을 바라는 욕망을 제도에 걸맞게 변형시켜 귀에 귀걸이 코에 코걸이 하듯이 걸게 되는 순간, 욕망은 그 제도의 허위에 어쩔 수 없이 전염된다. 그래서 어떤 계기로 제도의 허위가 낱낱이 밝혀지더라도, 제도에 동의한 인간은, 제도가 만들어준 욕망의 가면을 쓴 인간은 그 허위에서 벗어날 새 없이 물들게 된다. 그래서 그토록 양심의 편에 서서 딸들을 지지하려던 허성 씨도 결국엔 ‘감쪽같이’란 말에 자신을 내맡기게 된 것이리라.
아무리 남녀평등 사회라고 말들은 하지만, 결혼 풍습의 약자는 여성이며, 여성의 가족들이라고 소설은 말하고 있다. 속는 것도 그들이고 결국 받아들이는 것도 그들이라고. 소설은 결혼 제도가 가진 추악한 허위, 여성을 위한다는 감언이설을 경고하고 있다. 어쩌면 결혼을 만들어낸 사회 자체가 감언이설일지도 모른다. 이 소설은 그 거대한 감언이설 그 자체를 까발린다고 할 수 있다.
문장들이 복잡하진 않지만 한껏 벼려 있어서, 이야기 흐름에 익숙해지면서 자연히 방심할 때마다, 인물들이 행복에 가까워지려는 때마다 허를 찌르는데, 그 때문에 얼마나 탄식하며 읽었는지 모르겠다. 온몸에 소름이 돋은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다.
욕망이란 인간이라면 모두가 갖고 있는, 부정할 수 없는 본성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삶에서 갖은 사람들과 얽히며 벌어지는 사건들은 때론 그런 욕망도 부정한다. 부정과 부정, 욕망과 욕망의 파도에 휩쓸리다 허덕이다 도착하는 곳, 그곳이 바로 삶의 현재가 아닐까 싶다. 나 자신을 휩쓸리게 하는 부조리들, 물질적인 욕망과 권력, 위계 등을 문제시하는 동시에 그런 것들에 휩쓸리지 말고 스스로 길을 만들어 나아갈 줄 알아야 한다고 날카롭게 경고하는 소설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