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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inemmiri님의 서재
  •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
  • 벵하민 라바투트
  • 14,400원 (10%800)
  • 2022-06-07
  • : 4,762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 – 벵하민 라바투트 (노승영 옮김)

앞표지부터 시작해서 고작 260여 쪽에 담겨 있는 활자들이 이렇게도 소중하고 참담하면서도 빛날 줄이야. 밤의 정원사를 읽을 때쯤 밤의 정원사가 분명히 앞에 나왔던 인물들 중 한 명일 것 같기는 한데 정확히 누군지는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이렇게 제대로 독서의 묘미를 알려주는 고마운 책의 가격이 궁금해져서 뒤표지를 들춰 보았다. 16,000원이라니! 이건 순전히 책의 두께로만 책정된 금액인 것 같았다. 겨우 16,000원에 나는 평소라면 접하기 힘들었을 엄청난 지적 여정을 할 수 있었고 이해하고 싶지만 이해하기도 힘들거니와 이해할 수도 없을 우리의 이 세상에 대해 저 유명하고 명석한 학자들이 신경쇠약이라고까지 할 수 있을 정도로 실재와 실재를 구성하고 운영하는 원리에 대해 해왔던 몰입과 고뇌, 그리고 심오하고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논쟁과 탐구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까지 얻을 수 있었다. 정말로 감사한 일이다. 나는 이 책 리뷰의 키워드를 2개로 잡았다. ‘우연의 아이러니’와 ‘영원회귀’. 제목을 처음 접했을 때 들었던 생각은 ‘이해하길 멈출 때 세상이 잘못 된다?’였는데 다 읽고 나서 리뷰 작성을 위해 한 번 더 훑어보며 들었던 생각은 아무래도 이것이다. ‘이해하길 멈출 때 이해가 된다.’ 이 말 또한 아이러니이기에 이참에 아이러니를 사랑해야겠다는 마음도 든다. 그리고 우연과 아이러니로 가득 찬 세상을 좀 더 초연하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겠다.
코로나 때문에 독서토론이 힘들기에 평소 독서를 할 때에도 온라인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리뷰까지 꼼꼼하게 읽으며 나의 독서 경험과 비교하는 걸 즐기는데 이 책은 리뷰까지 작성할 요량이라 작가에 대해서도, 다른 리뷰들도, 게다가 리뷰 심사위원이라는 옮긴이에 대해서도 쭉 살펴보고 나서 지금 리뷰를 작성중이다. 독서하며 떠오르는 말들이나 쓰고 싶은 글귀들이 여기저기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어 그것들을 글로 써 보고 정리하는 데에 시간이 조금 걸렸다. 보통 소설도 아니고 수포자이자 과학 문외한이었던 내가 읽기에는 진도가 빨리 나갈 수 없었던 소설이니만큼 당연한 일이다. 다행히 만학도를 자처하며 양자역학이라는 이론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기에 버브 부녀가 쓴 책인 ‘만화로 보는 이해하면 이상한 양자역학’을 가볍게 읽기도 하고 유튜브 영상으로 조금이나마 개념을 인지하고 있던 터라 마감기한에는 맞춰서 읽어낼 수 있었다. 또 한 가지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고전문학 독서를 꽤 해 왔었기에 이 책의 행간과 맥락을 큰 끊김 없이 따라갈 수 있었다. 이 책에서 다루는 수식어구들이 짧지 않은 편이라 잠깐 헛생각이 들면 문장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부분이 꽤 있다고 느꼈기 때문에 독서력을 쌓았던 것 또한 다행이라 여기는 것이다. 물론 모르는 단어들과 인물들이 나올 때에는 인터넷 검색해서 연관된 내용들까지 연구하다시피 모조리 둘러보느라 흐름이 꽤 오래 끊기기는 했지만. 그래서 마감일을 이렇게 딱 맞춰서 작성한 적은 처음이라 긴장감이 조금 들기는 하는데 이게 야릇한 긴장감이라고 할 수 있어서 마치 웹투니스트나 작가들이 마감기한에 맞춰서 작품을 끝내는 맛이 있다고 하던 그런 느낌이랄까. 서론이 너무 길었다. 하지만 빠뜨리고 싶지 않았던 나의 리뷰 서론이었다. 대회에서 지정한 리뷰 분량이 적은 편이라서 서론은 짧게 들어가고 본론을 더 많이 써야겠지만 내가 리뷰 초고를 짜면서부터 생각하기에 이 책은 본론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서론을, 그리고 서론보다는 결론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나누어야 할 것 같았다. 야릇한 긴장감을 지닌 채 내가 정성껏 읽었던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에 대한 나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겠다. 이야기를 나누는 방법이 너무나 다양해진 이 시대에 리뷰 작성도 하나의 이야기일 테니.
작가가 참고했던 많은 서적을 토대로 실제 있었던 일들을 뼈대삼아 세우고 그 뼈대를 중심으로 해서 작가의 기발한 상상에서 태어난 스토리들로 살붙여가며 뼈대를 촘촘하게 메꾸어 기묘하면서도 아름다운 기둥으로 만들어낸 이야기들에서 배우고 느낄 수 있던 것이 너무 많았다.
18세기에 스위스 염료 제조업자 요한 야코프 디스바흐와 그의 도제 요한 콘라트 디펠이 있었다. 그들은 스페인의 카민 독점을 무산시키고자 했다. 디펠이 혼합한 동물 부위 증류액 위에 디스바흐가 칼륨염을 부어 레드루비 색깔을 재현하여 카민을 만들어내려던 것이었다. 그러나 결과물은 그들이 원하던 빨간색이 아닌 파란색이었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프러시안 블루다. 별이 빛나는 밤과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에 쓰인 이 파란 염료는 순전한 우연에서의 탄생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프러시안 블루는 우연의 탄생이었고 그 색은 참으로 아름다웠지만 디펠이 혼합했다던 동물 부위 증류액은 우연히 만들어지지도 않았고 그 증류액에서 만들어지고 내뿜었던 색의 아름다움과는 거리도 멀었다. 디펠이 그 증류액을 생명의 영약이라며 만들어 내던 과정이 너무나 끔찍하고 잔인했기 때문이다. 산 동물과 죽은 동물들로 실험을 했고 희생물의 부스러기를 짜 맞추는 데서 변태적 쾌감을 느꼈다고까지 한다. 참 아이러니하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우연의 산물을 내버려 두지 않았던 화학자가 있었는데 그는 칼 빌헬름 셸레다. 그가 1782년에 극미량의 황산을 입힌 스푼으로 프러시안 블루를 휘저어 화합물을 만들어 이를 프러시안산이라고 명명했다. 이것은 현대의 가장 강력한 독약이 된다. 작가가 인간의 사유에 한계가 어디까지일까를 염두에 두고 글을 썼다는데 사유뿐만 아니라 탐욕에도 한계가 있을까를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 아이러니한 것은 인간의 탐욕이 아니라면 우연에 의한 발견도 없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위에서 이어지는 두 이야기만 보더라도 스페인의 카민 독점을 없애고 본인들의 이익을 추구하고자 붉은 안료를 만들어 내려다 우연히 프러시안 블루를 탄생시켰고 이 우연에서 시작된 발견이 아름다움이었다가 아름다운 부산물을 합성한 화합물이 다시 강력한 독약으로 탄생하게 된다. 이런 아이러니가 비단 위에 언급한 일만이 아니다. 이 책에서만 보더라도 공기에서 빵과 죽음을 동시에 만들어낸 과학자로 알려진 프리츠 하버, 아인슈타인이 양자역학 이론의 방정식을 발표한 지 한 달도 안 된 때 전장에서 총알들이 머리 위로 날아다니는 집중포화 속에서 해를 풀어낸 슈바르츠실트, 양자역학을 혐오해서 코펜하겐 해석의 옹호자들을 부정하고자 상자 속 고양이 이론을 만들어 내 오히려 현재까지 양자역학을 설명할 때 대표적인 예시로 쓰이게 한 슈뢰딩거, 양자역학 이론을 처음 발표하고도 정작 자신은 양자역학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아인슈타인. 책 밖에서도 이런 아이러니는 셀 수가 없고 지금도 일어나는 현상일 것이다. 우연을 믿지 않거나 믿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겠지만 그동안 읽어왔던 책들, 그 중에 내가 우연을 믿을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책들 덕분에 책에 나왔던 몇몇 인물들처럼 세상을, 세상을 구성하고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나 원칙을 알아내고자 스스로를 정신을 잃을 정도로 한계까지 밀어붙이거나 자연을 제외한 세상 모든 것과 등질 정도로 은둔하는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이 들지는 않는다. 내가 아무리 세상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들 수많은 우연들로 이뤄진 공간, 아니 공간뿐만 아니라 시간까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으랴. 실재하지 않는 것을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이론이나 방정식, 좌표, 기하학 들을 연구하는 수학과 물리학이 앞으로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이 세상은 이해될 수 없고 이해하려고 할수록 더욱 이해하게 될 수 없을 것이다. 세상이라는 말 자체가 실재가 아니어서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세상이 만들어진 기원 자체가 우연이며 인간이 인간으로 진화하게 된 과정 자체도 아마 우연일 수 있기에 원리를 파헤치려 할수록 참 명제나 명확함이 잡힐 것 같으면서도 잡았다고 생각해 꽉 쥘수록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는 모래알들처럼 느껴지게 되기 때문에. 이 세상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그 빠져 나가는 모래알들마저 단 한 톨도 놓치지 않고 파악해야 하는데 그건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 아닐까. 한 가지 방정식을 해결했는데 거기서 갈라져 나온 또 다른 방정식이 난데없이 튀어나와 풀리기를 기다리고, 그 새로운 방정식을 해결하면 또 새로운 방정식이 우연히 발견되어 해결되기를 기다리고. 마치 지금의 양자역학처럼 말이다. 이는 역학에서뿐만이 아니라 화학, 생물학, 미생물학, 고고학, 천문학 등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혹시나 양자역학을 인류가 이해할 수 있게 되는 날이 오더라도 또 다른 이해불가의 영역이 도래할 것이다. 그게 세상의 알 수 없는 원리다. 정말 얼마나 절망적이고 좌절스러운지 모른다. 끝이 없다는 것이. 양자역학의 원리인 or 이 아닌 and 개념처럼 인간은 삶 and 죽음을 살아가고 있다. 태어나자마자 죽음을 향해 살고 있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것은 마치 양자역학에 빗댔을 때 신이 우리를 실재하는 대상으로 측정하면 삶이고 실재하지 않는 대상으로 측정하면 죽음인 것과 같다. 그런데 개별적인 인간으로서의 실체가 죽음에 이르더라도 그것은 실체의 죽음일 뿐 신의 현현이라고 할 수 있는 자연과 인류의식은 또 다른 개별적인 모든 것의 탄생이자 시작이 될 수도 있다. 우로보로스처럼 끝이 없다. 끝없이 문제와 해결들이 번갈아 나타나는 이 절망적이고 좌절스러운 세상에서 인류는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새로운 문제들을 해결해 가며 살아갈 것이다. 거기에 ‘타인은 없다.’고 했던 스리 라마나 마하리쉬의 말처럼 자연과 인간의 조화와 아름다움도 지켜가며 살아간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지구가 슈바르츠실트 특이점에 다다라 돌아올 수 없는 지점으로 사로잡힐 때까지.
작가가 한국 독자에게 감사인사를 촬영해서 보낸 영상을 보니 다음 작품에서 다루는 인물들 중 한 명이 이세돌 9단이라며 고맙게도 한국인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세돌 9단을 그려냈다는 이유 외에도 지금 리뷰작성을 거의 끝내가는 그의 3번째 작품에 말 그대로 반해 버렸기 때문에 그의 다음 작품도 매우 기다려진다. 덧붙여 나의 책장에 구매만 해 놓고 나중에 읽을 책들이 참 많이도 꽂혀 있는데 그 중 옮긴이의 아름다운 번역으로 알려졌다는 향모를 땋으며도 바로 읽어볼 작정이다.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를 읽으며 작가뿐만 아니라 옮긴이의 고군분투가 고스란히 느껴지기도 했고 얼마나 아름다운 번역인지 한 번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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