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참 괜찮은 눈이 온다 – 한지혜
‘개천’과 ‘용’을 소재로 시작하여 누구나 가질 수도 있겠지만 잘 밝히려 하지 않을 도덕적 우월감을 담담하게 고백하고, 자신이 경험했던 가난을 소재로 글을 쓰면서 그보다 더 가난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부끄러워하기도 하고 어렸을 적 끔찍하게 가난하게 살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오만과 치기뿐이었음을 느끼고 나서부터는 누구도 함부로 연민하지 않았다고 밝히는 프롤로그에서부터 그녀가 마음에 들어왔다. 아직도 한국문학에 문외한인 탓에 처음 본 그녀의 이름과 글이었지만 금세 내 마음을 빼앗겼다. 그 시절 대부분이 그랬듯이 나 또한 넉넉한 어린 시절을 보내지 않았기에 공감 가는 내용도 너무 많았고 추억을 떠올릴 만한 내용들도 정말 많았다. 다른 점은 정말 다행히도 내가 부모님과 사이가 좋고 (성인이 되고 결혼해서 뱃속에 아이가 있는 지금 점점 더 좋아지고 있다.) 부모님을 사랑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보통 딸들이 그러하듯 엄마와의 갈등과 불화는 있었지만 엄청나게 용기를 냈던 3번의 허심탄회한 대화와 눈물바다를 이룬 후로는 앙금이 남지 않아서 가능한 일이다.)
인생 선배라고도 할 수 있을 그녀에게서 배운 게 너무 많아서 정말 고맙다. 부모님, 아이, 나의 꿈과 열정, 인생의 고난과 극복, 수많은 어릴 적 추억과 기억들과 같은 개인적이고 개별적일 수 있는 것부터 위로와 격려, 성공과 희망에 대한 역설, 사회의 역할과 책임, 교육의 중요성, 시대정신과 의식과 같은 전체적이고 상호작용적인 것까지 아우르고 있는 산문 한 편 한 편이 더없이 소중하다. 늦은 나이에 시작한 독서와 리뷰인생에서 10번도 채 되지 않은 리뷰대회 참가 경험 중 한국작가의 작품도 처음이고 산문 장르도 처음이라 어떻게 리뷰를 작성해야 할지 감이 오지는 않지만 내가 느낀 바대로 쓰고 싶은 형식대로 작성하려고 한다.
어렸을 적부터 최근까지 겪었던 사건, 일화, 감정들을 과도한 수식어들 없이 깔끔하고 담백하게 펼친 글들에도 적잖이 감동했지만 그녀가 속해 있는 사회에도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고 반성하고 자문하고 해결책을 찾기 위한 시도를 하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촉구하는 글들에도 감탄해 마지않았다.
특히 남들 눈에는 별 거 아닌 일에도 가끔 눈물바람인 나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되었던 ‘울어도 돼’ - 마음껏 울 수 있는 사회가 건강하고 바람직한 사회라며 눈물 흘린 만큼 위로받고 아픈 만큼 성장을 기대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모습에서,
‘쫓겨난 늑대는 어디로 가야 할까’ - 사회의 안전을 도모한다는 이유로 배척과 혐오, 격리, 낙오를 일삼는 우리들의 모습을 반성하고 그로 인해 쫓겨나야 하는 사람들이 갈 곳은 어디인지도 걱정하는 모습에서, 그래서 우리 사회는 실제로 안전한가도 되묻고 도처에서 볼 수 있는 혐오가 늘어남에 따라 그 혐오와의 공존에 대해서도 고민하는 모습에서,
‘꿈조차 꾸지 못하는 아이들’ - 학력주의자와 계층주의자 중 누가 더 나쁜지 생각해 보곤 한다며 자본이 꿈을 제한하는 사회, 지금 우리의 현실이라고 걱정하는 모습에서,
‘요정과 마녀 사이’ - ‘빙의’를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메타포로 이해했는데 요즘은 ‘죄’와 ‘사람’이 다른 것인지 헷갈린다고 의심하는 모습에서 (나 또한 예전에는 사람이 죄를 지을 때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마치 빙의된 것처럼 저지르는 것이라고 생각했었지만 갈수록 그 사람의 본성과 천성으로 죄를 지은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권력과 폭력’ - 우리에게 선택, 판단하는 권한을 갖게 되는 순간이 올 때 ‘혼자에게만 정당한 기준을 갖지 않도록 해야 한다’며 자신을 향한 ‘다짐’이자 권력을 가진 분들에게 ‘부탁’하는 말이라고 피력하는 모습에서 그녀에게 한 인간으로서 공감도 많이 됐고 작가로서의 관심과 통찰에 존경스럽기도 했다.
1. 그녀와 그녀의 가족, 그리고 나와 나의 가족
‘숨어있기 좋은 책’ - 현실에서의 도피처로 선택한 시간과 장소. 식당을 운영하던 엄마. 택시운전을 하던 아빠. 가난했던 집과 동네에서 겪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들. 톰 소여와 허클베리 핀과 같은 모험가들과의 여행 이후 소공녀의 ‘새라’에게서 받은 환상 같은 위로, 다락방 같은 기적. (기적이 뭐 별건가, 꿈을 꾸면 기적이지.) 동심과 희망의 세계를 파괴했던 최초의 잔혹동화 ‘못나도 울 엄마’. 인생은 비극이고, 비극이 곧 성장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 독자로서의 삶이 작가로서의 삶으로 건너가게 해 준 동화. 리얼리즘을 가르쳐준 최초의 책. 마지막으로 읽었던 동화. 더 이상 권선징악을 말하지 않는 세계로 건너와 비로소 제대로 책을 읽기 시작. (스트레스를 쉽게 받는 기질을 가지고 있는 내가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가장 빠르고 강력한 방법이 독서다. 그렇게 나도 책에 숨어있기 좋아했다. 그러나 많은 사건, 사고들을 겪고 난 후로 책과 현실(레알)의 괴리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의 중심점을 찾아가고 있는 중이다. 그녀가 ‘못나도 울 엄마’라는 동화로 리얼리즘을 알게 됐다는 단편에서 또 한 번 공감이 된 부분.)
‘누가 우리의 가족인가’ - 정말 새로운 시각과 생각을 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어릴 적 완전한 결합체라 생각했던 가족이 나이가 들어 생각해 보니 사실은 매우 특이하고 불안정한 결합체의 단위라는 것, 가족의 생성이라는 것은 서로 너무도 다른 서사를 가지고 살던 타인 둘이서 하나의 서사를 써내려가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선천적 결합보다는 후천적으로 공유한 경험의 집합체로 언제든 결합될 수도 해체될 수도 있기에 ‘누구나’ 가족이 될 순 있지만 ‘아무나’ 가족이 될 수는 없고 가족을 가족으로 존재케 하는 일도 전적으로 우리가 하는 것. 언젠가 읽었던 메리 파이퍼의 ‘나는 내 나이가 참 좋다’에서 봤던 내용 중 가족 사이의 갈등과 불화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이해와 용서를 생각하면 국제연합이 하는 일은 애들 장난에 불과하다는 메이 사튼의 말이 떠올랐다. 가족을 가족으로 존재케 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2. 그녀의 추억들, 그리고 나의 추억들
‘내가 살던 골목에는’ - 메밀묵 장수의 ‘사려엇~’소리, 뾰족구두 신고 아슬아슬하게 비탈길을 내려가던 젊은 여자들의 엉덩방아 찧는 소리, 여름철 장대비 소리, 한겨울 자박자박 눈 내리는 소리를 들려주던 슬래브 지붕. 담벼락 낙서와 숨바꼭질, 다방구,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소꿉장난 놀이들. 내게도 떠오르는 엄청난 추억들. 나 또한 한 지붕 열세가족이 살던 마당이 크고 낮은 옥상이 있던 다세대 주택에 살았다. 동네 아이들과 방과 후 해질녘까지, 엄마들이 저녁 먹으러 오라고 소리치기 전까지 질리는 줄 모르고 놀았던 일명 ‘도깨비 방망이’ 구조물. 그 금속냄새가 아직도 기억에 또렷하고, 도깨비 방망이가 놓여있던 공터와 그 옆을 흐르던, 옆 동네와의 구획을 나눠주던 더러운 개울가도 눈에 선하다.
‘해바라기를 심었더니 그리움이 피네’ - 식물 키우는 것에 상처를 받았던 그녀가 캔 화분으로 키워낸 해바라기의 꽃봉오리 맺힌 날 죽은 식물도 살린다는 ‘초록엄지’였던 (영어표현 green thumb를 우리말로 그대로 옮긴 이 단어에서 그녀의 재치를 보고 소리 내어 웃었다.) 아버지가 잘 키워냈던 풋고추 따서 밥상에 올려주던 것처럼 무덤가에 올려놓으면 기뻐하실지 궁금하다고 하는 데서 목구멍에 뭔가 차오르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렇게 나이를 먹고 처음 기른 식물에서 그리움을 배우고 어떤 그리움은 꽃으로 피어난다고 했다.
‘내 영혼의 불량식품’ - 입덧으로 이것저것 못 먹다 어렸을 때 먹었던 불량식품들을 까먹었던 그녀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을 너무 쉽게 잊은 자신 때문에 목이 멨다고 한다. 아빠가 직접 만들어주던 칼국수와 돼지고기 수육을 먹고 싶은데 그 음식들을 해달라고 조를 아빠가 세상에 없으며 먹고 싶다는 생각만으로도 눈물이 쏟아진 후에야, 입덧 하는 동안 잊고 있던 그리움을 먹느라 수시로 마음이 뻑뻑해진 후에야 잊은 것, 그리운 것, 추억해야 할 것이 많았던 걸 느끼는 걸 보고 지금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 잘 해야겠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했다.
‘엄마의 맛’ - 사이가 좋지 않았던 엄마에게 던졌던 자신의 미움과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엄마와의 추억을 되새기는 일이 아직 두려워서 일부러 엄마가 가르쳐준 방법을 피했다가 모두 망친 여름용 저장반찬을 씹을 때마다 미움, 후회, 미안함, 옹졸함을 함께 삼켰다고 한다. 이런 복잡 미묘한 감정을 덜 느끼기 위해서라도 지금 옆에 계실 때 잘 해드려야지.
‘서울 78-236415의 남자’ - 아빠가 버리지 않고 모아두었던 아빠의 가계부 안에 있던 근로 이력 증명서들. 아빠가 그랬듯이 그녀 또한 교육 인증서, 명함, 영수증, 청탁서, 출판사의 거절 답장들을 버리지 못한다. 이유는 그것을 버리는 순간 그녀의 열정, 최선, 꿈과 좌절을 모두 버리게 될 것 같아서 미련이든 열정을 위해서든 실패를 간직한다고 했다. 아빠만의 방식으로 삶을 증명했듯 그녀 또한 그랬고 나도 사실 각종 과거들을 보여주는 문서들과 물건들을 간직하고 있다. 남들 눈에는 그저 종이뭉치들이나 잡동사니로 보이겠지.
3. 성공에 대한 역설
‘누구에게나 빛나는 한 가지’ - 문예지 응모작 심사를 맡은 작가가 서툴고 미흡한 작품일수록 더 천천히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하게 읽는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보석 같은 문장이 한두 문장쯤 툭 튀어나오기도 하는데 그런 문장을 만나는 순간이 너무 좋아서라고 했다. 리뷰대회에 응모하려고 리뷰작성 중인 내게 더할 나위 없이 고맙고 특별한 존재로 다가온다.
‘성공 대신 성취’ - ‘새옹지마’의 인생 역정을 생각해본다. ‘성공’은 시스템의 문제, ‘성취’는 온전히 개인의 몫. 끝도 없이 나쁜 일만 찾아왔던 서른 살에 바닥을 치며 차라리 마음이 편안해졌다고 한다. 그렇게 그녀는 신춘문예 응모자들에게 행운을 빌었지만 나는 나에게 행운을 빌어주는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놓친 ‘성공’ 대신 나의 패배가 이룰 ‘성취’를 기약하라고 말이다.
‘생략된 삶에 대한 연민’ - 공모전 심사에서 소설을 쓴 사람의 삶으로 느껴져서, 소설 한 편을 기어이 끝낸 사람에 대한 예의 때문에, 혹시 만나지 모르는 빛나는 문장에 대한 기대 때문에, 어떤 삶도 함부로 생략하거나 건너뛰어서는 안 된다는 믿음에 대한 증표처럼 비효율적인 읽기를 멈출 수 없다는 그녀에게 존경심이 우러난다.
‘4등이어도 괜찮아’ - 존재조차도 몰랐던 영화 ‘4등’을 보고 주인공이 끝내 1등을 하지 않기를 바랐건만 결국 1등을 한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그녀. 자신의 아이에게도 자신만의 속도가 있으니 그 속도에 맞춰 살라고 조금 지거나 늘 져도 괜찮다고 말해줄 수 있을지 자문하며 단편을 끝낸 그녀. 나 역시 나 스스로에게는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만 태어날 아이가 성장한 후에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다.
4. 받았던 위로와 격려 돌려주기
‘세월은 가고 사람은 늙지만’ - 꿈은 남는다. 창간 전문 편집장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잡지 창간이 꿈이었던 사십대 중반의 선배. 꿈이 있고, 꿈을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불가능은 없을 것이다. 그 나이에 첫발의 꿈을 디딘 걸 보고 눈물이 나도록 부러웠다는 그녀. 다가올 나이 마흔을 생각하며 꿈이 나이와는 상관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는 그녀.
‘참 괜찮은 눈이 온다’ -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로 시작하는 미당의 시에서는 눈이 ‘괜찮다’는 소리로 내린다고 한다. 그리고 그 눈 소리를 그녀도 들은 적이 있다고 한다. 서른이 된 참이었던 시절 구조조정으로 인한 송별식의 주인공이 되었던 그녀는 식물인간 아버지가 기다리는 집으로 백수가 되어 돌아가야 하는 날. 기억나지 않는 어느 술집으로 들어가 라이브 밴드의 반주에 맞춰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 노래를 부르던 날. 그녀는 이 날 어떤 순간을 느꼈다. ‘아주 사소한 진지함’으로 ‘태산 같은 막막함’을 훌쩍 뛰어넘는 순간을. 그렇게 술집에서 나올 때 폭설이 쏟아졌고 함박함박 떨어지던 그 눈이 그녀의 귓가에 위로하며 말했다.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그 ‘괜찮다’는 소리와 함께 서른이 시작되었고 그녀의 삶도 한결 깊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나에게도 위로를 건네주었다. 무엇이든 마음을 낮추면 세상 만물은, 그 안에 깃든 마음은 다 괜찮아질 수 있다고. 마음을 낮춘다는 건 욕심을 내려놓는 걸까.
5. 진정한 내면의 완성은 외부로의 관심
‘아이는 어쩌고?’ - 대부분의 여성 노동자가 겪고 있듯이 여성으로서 게다가 아이를 기르는 작가로서의 그녀도 고용불평등의 현실, 불편과 차별의 시선은 마찬가지라고 한다. 더구나 창작이라는 행위를 비생산성으로 보는 사회에서 작가의 삶은 가족 전체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먹고사는 문제인 ‘밥’ 때문에 작가로서의 존엄과 정체성이 개인의 의지와 무능으로 돌아왔다고 자조하는 부분에서는 작가들이 처한 현실이 녹록치 않다는 걸 실감했다. 작가로서의 삶을 막연히 꿈꾸고 있는 내게 자문하고 고민하게 하는 부분이었다.
‘당신이 누구인지 당신이 말할 수 있게’ - 보통 생각하는 ‘사회적 인간’에 대한 정의를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장들이 많았다. ‘리어왕’에 나오는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사실은 타인이며, 타인의 시선과 통제가 자신을 규정하고 통제하며 그렇게 우리는 ‘시선에 갇힌 인간’이 된다고 했다. 그래서 때로는 자신도 타인의 삶에 대해 간섭하고 규정, 통제하는 오만을 저지르며 살고 있다고 했다. 내가 누구인지는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말하고 싶어 하면서 상대방이 누구인지는 자신이 규정하고 싶어 하는 이기심에서 자유롭기 힘들다는 말도 마음에 와 닿았다. 그녀가 말한 대로 꽃들도 자기 이름으로 태어나 자기 이름으로 저무는데 하물며 숨 쉬며 살아 있는 삶은 물론 죽음에 대해서까지 그런 이기심을 표출하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 인간들은 서로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지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봤다.
‘대한민국 김장 노동자’ - 단편 제목에서 또 한 번 그녀의 재치에 감탄한 부분. 감정 노동자 패러디 김장 노동자. 그러나 김장을 하는 사람이 여전히 여자들이라는 점을 최근에야 인식했다는 그녀를 보고 나도 새삼 놀랐다. 나 또한 어렸을 때부터 봐 오던 엄마와 이모들, 그리고 친구들의 김장철 모습을 보면서도 단 한 번도 왜 여자들만 김장을 하는지에 대해 궁금해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해 그녀보다 더 절실하게 쓸 수는 없을 것 같다. 고난은 내가 그 한가운데에 있지 않을 때에만 위대하며 노동이나 모성도 바깥에 서 있는 자들이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용서의 나라’ - 사춘기 시절 아는 사람에게 성추행을 당했던 그녀의 고백에서, 여전히 진행 중인 #METOO 사건들에서 여전히 여성들은 ‘다정과 격려’로 포장하는 남자들이 권력을 잡고 있는 이 나라에서 성추행, 성희롱을 일상처럼 경험하는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도 지금의 내 직장은 여성들로만 구성되어 있어서 그런 위험에 노출되어 있지 않지만 돌이켜보면 그게 성추행이나 성희롱이라 생각하지 못 했을 정도로 어린 나이에 옆집 언니와 오빠에게 당했던 일들이 어렴풋이 떠올라서 당황스럽기도 했다. 그리고 만일 내가 지금 직장에서 생활하지 않았다면 또 하나의 스트레스와 고통을 겪으며 생활했을 걸 생각하니 아찔하기도 했다.
‘인문학적 수학’ - ‘평균, 평균의 수치’에 대한 고민을 엿볼 수 있던 단편. 특히 최저임금제 개편으로 인한 삶의 조건에 필요한 수가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의 수’에 대한 고민을.
‘촛불 이후 광장은 진화할까’ - 2016년 탄핵정국의 해에 권력형 비리라 할 수 있는 그동안 숨겨졌던 사회의 치부와 비리들이 민낯을 드러냈고 우리는 정치와 투표에 대한 냉소와 무관심이 빚어냈다는 책임의식과 부끄러움으로 분노했고 더 늦기 전에 용기를 내 싸우기로 했고 우리 가족들을 포함해서 많은 시민들이 촛불을 밝혔다. 탄핵을 성공했다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녀가 자문한 것처럼 우리는 같은 것을 비판해도 다른 방식으로 비판하는 태도에 대해 관용을 베풀어야 하고 그것이 바로 성숙한 시민, 국민의식일 것이다.
‘치유의 광장’, ‘고통은 왜 증명해야 하는가’ 그리고 ‘생리대 기본권’ - 고통을 받고 있음을 알려야 하고 도움을 받기 위해 증명해야 손길을 내미는 사회, 도움을 주기 위한 인프라는 구축하지도 않은 채 지원을 구실로 고통 받고 있는 사람에게 다시 한 번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는 선별작업, 치료와 지원을 받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의식과 시선. 그것들이 해결되지 않는 이상 악순환은 계속 될 것이다.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역시나 교육이 답일 것이다. 국가에서 행하는 어른들을 위한 교육, 그리고 거기서 어른들이 행하는 자녀들을 위한 교육. 국가와 어른이 정책과 말로만 행하는 교육이 아니라 몸소 실천하는 것을 보여주는 교육만이 답일 것이다.
6. 꿈과 목표, 열정과 열매, 운명과 행운
‘꿈, 견디면 즐거운’ - 황동규 시인의 시 ‘꿈, 견디기 힘든’의 역설. 시의 마지막에서 시인이 정의한 꿈은 ‘신분증에 채 안 들어가는 삶의 전부’라고 했다. 신분증에 채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많고 실패했을 꿈을 대하는 자세와 태도가 삶의 색깔을 결정하리라며 성취 여부와 상관없이 꿈을 꿈 자체로 견딜 수 있을 때 삶이 가장 아름다웠다고, 인생의 풍요로움은 꿈을 대하는 태도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르겠다고 하는 그녀의 통찰에 놀랐다. 그녀가 언급한 대로 실패해도 버리지 않을 때, 꿈은 꿈 그 이상의 되어줄 거라고 나도 굳게 믿고 있다.
‘멈추지 않는 순간’ - 삶은 완성, 미완성의 문제가 아니라 장 폴 사르트르의 말처럼 시작 (Birth), 끝 (Death), 그리고 그 사이의 과정 (Choice)들일 것이다. 그리하여 삶은 덜 이룬 것도 다 이룰 것도 없이 생의 다음 순간,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생의 움직임 그 자체’이고 그저 삶일 뿐이다. 모든 생이 ‘수시로’ 구렁에 빠지고 ‘끝내는’ 실패할 수도 있지만 우리가 생을 ‘멈추지 않는 순간’ 행복을 향해 다가서고 있는 것이고 ‘적어도’ 목표를 향해 한번 더 발걸음을 내디디며 걷는다면 우리의 삶이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닌 것이다.
‘마음이 가리키는 운명’ - 모든 게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는 아주 평범한 진리를 점집 순례로 깨닫게 되는 과정을 흥미롭게 볼 수 있었다. 나의 마음이 미래를 좌우한다는 걸 깨달은 후 점집 순례를 끝나고 대신 하루하루를 마지막처럼 살아갔다는 그녀. 그녀의 마음이 토정비결이듯이 내게도 토정비결은 내 마음일 것이다.
‘시간을 소유하는 법’ -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비추어 보더라도 직접 경험해 본 것을 생각해 보더라도 유한하지만 그 유한함 안에 무수히 많은 가닥을 품고 있는 시간은 내밀하고 풍부하므로 그 시간 안에서의 ‘찰나’를 온전히 소유하기 위해서는 그저 시간이 흐르도록 내버려둘 것이 아니라 찰나의 기쁨, 황홀, 자유를 만끽하여 시간을 무언가로 만드는 알림이 우리 내면에서 울리게 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온전히 시간을 소유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바닥을 딛고 서는 힘’ - 아파트 베란다에 작은 텃밭처럼 식물을 키우던 그녀에게 푸르고 여린 것들이 희미하게 전하는 것 같았다는 잠언을 나도 듣고 싶다. 발아열이라는 엄청난 내열을 견뎌야 싹을 틔우는 씨앗의 모습에서 열악한 환경을 어떻게든 제힘으로 넘어보려 노력하는 모습에서 경이로움을 느꼈을 그녀처럼 나도 그 경이로움을 보고 느끼고 싶다. 식물이 바닥을 치고 딛는 힘이 강할수록 꽃, 열매도 실하듯이 나도 삶이 아무리 고통스럽고 바닥을 치는 것 같다 느껴지더라도 오히려 섣불리 솟구치지 않고 바닥까지도 기어이 내 것으로 움켜쥐는 그런 바닥을 치고 딛는 힘을 발휘해 보고 싶다.
‘반짝반짝 빛나는’ - 고등학교 동창 A의 꿈에 대한 도전 이야기를 곁들인 단편에서 건져낸 아름다운 문장. 자기 자신을 위해 열정을 다하는, 반짝반짝 빛나는 순간을 만나는 행운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건 아니다. 그렇다. 자신을 위한 열정을 불태우는 순간이 바로 반짝반짝 빛나는 순간이고 그것은 행운이다.
7. 삶과 죽음
‘세상과 아름답게 이별하는 법’ - 식물인간이 되어 삶도 죽음도 아닌 모호한 경계의 시간이 시작된 아빠를 돌보며 죽음의 존엄에 대해 처음 생각했다는 그녀. 예전에 읽었던 책에서 알게 되었던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쌓여 의연하고 덤덤하게 아름답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 죽음의 예술, ‘Ars Moriendi’를 상기할 수 있었던 것과 ‘드라이빙 미스 노마’인 91세 노마 할머니의 미 대륙 횡단 이야기를 읽는 것이 내게 아주 귀중한 시간이었다. 또한 아직 내 곁에 건강하게 살아계시며 가끔 잔소리를 하셔서 마음에 짜증이 일어 죄송스런 마음이 들게 하는 엄마 아빠의 소중함을 새삼 느낄 수 있는 것 또한 너무 뜻깊은 시간이었다. 반드시 세상과 아름답게 이별할 거라던 그녀의 다짐처럼 나도 그렇게 이별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8. 어른과 아이, 부모와 자식
‘초보농사 고군분투기’ - 아이의 유치원 작은 텃밭에서 시작해 아파트 베란다를 거쳐 분양받은 청계산 텃밭에서 농사를 지으며 ‘삶 내 나는 소설’을 쓰려는 욕심도 내 봤던 그녀는 뜻대로 풀리지 않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고 얼마나 자신이 오만하고 경솔했는지 깨달으며 그녀의 욕심을 반성한다. 그리고 농사짓는 것이 자식 기르는 일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농사시기에 따라 유아와 사춘기 아이를 키우는 시기를 비교하며 공통점과 차이점까지 통찰한다. 아직 뱃속의 아이가 태어나지 않았지만 학생들을 지도하는 입장에서 너무 공감이 갔기 때문에 나도 뼈저리게 공감한 공통점이 있었다. 농사지을 때처럼 밭만 가꾸어주고 열매는 간섭하지 말자는 다짐을 하지만 사춘기 농사에서 마음속 천불 다스리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 그것이다.
‘부모로서의 용기’ - 그녀도 인정했듯이 아이가 실패했을 때 그 실패를 껴안아주는 방법이 정말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자식이 홀로 나서는 길을 바라보며 온전하고 독립적인 인간이 되는 과정을 사랑과 지지로 지켜봐주는 일에는 정말 큰 다짐과 용기가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자식들도 저 홀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하기에.
‘무엇이든 물어봐’ - 그녀의 아버지는 가난했지만 훌륭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하게 한 부분이 여기에 있었다.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걸 충분히 들어주어서 느꼈던 뿌듯한 기분이 알고 보니 아이가 성장하면서 정말 중요한 자존감이었다는 부분이 정말 좋았다. 그리고 아이의 질문에 답할 때 상상력을 키워주려는 마음에 은유나 상징을 쓰지 않고 정확한 설명을 할 때 너무 당연한 사실이 아이에게는 충격적이고 놀라운 발견이 될 수 있어서 아이의 마음에 더 신비롭고 신기하게 새겨진다는 걸 알게 된 것도 좋았다. 멀쩡한 사물을 비트는 동심은 어른을 위한 창조라는 것이다. 정말 명언이라고 생각한다.
9. 희망에 대한 역설
‘희망은 아프다’ - 이상한 기제라는 ‘아픔’은 심할수록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므로 창작의 고통을 산고에 비유하나 보다는 그녀의 말에 아직 뱃속의 아기를 낳지 않아봤고 제대로 된 창작의 고통을 겪지 못 했지만 두 달여 뒤면 산고도 겪을 것이고 출산 전후로 두 달여간 나름의 제대로 된 창작의 고통을 겪을 기회가 올 테니 그 말마저도 공감할 수 있기를 바란다. 간절히 바란다기보다는 닥쳐올 것이므로 차라리 바라는 쪽을 택하겠다. 그녀 또한 희망이 외려 아픈 것이라는 걸 느끼고 ‘꿈’은 그저 꾸는 자의 것이 아니라 컨트롤하는 자의 것이라고 하니, 엄청난 발아열을 견디며 싹을 틔우는 씨앗도,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사점을 만나고 그 사점을 지나 저절로 달리는 것과 같은 경험을 하는 마라토너들도 통이 있는 성장을 컨트롤하는 것이니 나도 컨트롤하는 쪽을 택하려는 것이다.
두 달여 뒤 두 달여간 나는 필히 아프고 괴롭고 불안하고 막막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내 삶을 성장시킨다는 걸 잊지 않고 도망치지 않고 꽃을 피워내겠다. 그리고 한 마을에 살지만 두 갈래 길인 붉은 길과 푸른 길에 살고 있는 여인과 이야기꾼만큼 마음으로 수를 놓거나 그 놓인 수의 매듭을 풀어 이야기를 만드는 수준까지 닿지 못하더라도 그녀의 이 소설이 그녀 자신에 대한 우화임을, 자신도 몰랐던 작가로서의 운명이자 태도였음을 뒤늦게 깨달았듯이, 그녀가 처음 소설가가 되었던 순간은 따 놓은 당상처럼 당연한 제1의 작가로 당선된 것이 아닌 두 명의 심사관들이 합의한 2등으로서, 거부당한 자로서 선택 받았듯이 나 또한 나도 몰랐던 그런 운명이었음을 알게 되는 소중한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나 또한 당신들에 대한, 나에 대한, 이 삶에 대한 이야기를 써 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