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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inemmiri님의 서재
  •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무선)
  • 페터 한트케
  • 10,800원 (10%600)
  • 2011-02-25
  • : 3,930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 페터 한트케
어제까지 썼던 페터 한트케의 ‘어두운 밤 나는 적막한 집을 나섰다’ 독서리뷰를 끝내고 오늘은 그의 또 하나의 소설인 이 책의 리뷰를 작성하려고 자리를 잡았다. 이 리뷰도 황금같이 주어진 휴가가 없었다면 리뷰 마무리는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확실히 ‘어두운 밤’보다는 심적 부담이 덜 했지만 ‘어두운 밤’ 리뷰를 쓰기 시작할 때와 상황은 비슷하다.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감이 잘 오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 역시 재독을 해야 그나마 좋은 리뷰를 쓸 수 있을 것 같다. 한 번 읽고 리뷰를 쓰려고 했을 때는 막막하고 작가가 나에게 뭘 말하고 싶어 하는지 명확히 알 수 없었지만 재독을 하면서 퍼즐을 맞춰 가듯이 실마리를 따라가다 보니 작가의 메시지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제목은 ‘긴 이별’이 먼저 ‘짧은 편지’가 나중이다. 하지만 목차는 그렇지 않다. 처음 읽을 때는 그냥 아, 그런가보다 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생각해보니 기가 막힌 설정을 한 작가에게 다시 한 번 놀랐다. 얼마나 적절한지 모르겠다. 소설 구성뿐만 아니라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 자신의 경험마저도 재해석하려는 시도를 여실히 보여주는 문체하며, 204쪽밖에 되지 않는 비교적 짧은 소설이 담고 있는 너무나도 큰 메시지, 그를 알지 못한 채 처음 접할 때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지만 그가 고심하며 썼을, 읽으면 읽을수록 사랑하게 될 것 같은 문장들도 정말 기가 막히다.
첫 번째 목차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아내 유디트가 뉴욕의 웨일런드 매너 호텔 보관함에 남겨둔 ‘나는 지금 뉴욕에 있어요. 더 이상 나를 찾지 마요. 만나봐야 그다지 좋은 일이 있을 성싶지 않으니까.’라는 ‘짧은 편지’로 시작되는, 장소 하나 바꿈으로 사실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것들을 마치 꿈을 잊는 것처럼 깨끗이 잊어버리게 만드는 데 많은 기여를 하기를 간절히 바라며 짧은 편지를 남겨두고 사라진 아내를 찾기 위해 미국으로 떠난 여행 초반의 이야기. 화자는 ‘편지는 짧고 간명했다’며 ‘회상해보건대 마치 세상의 빛을 처음 봤을 때처럼 놀랐고 당혹스러웠다’고 했다. 리뷰를 쓰는 지금 처음부터 소설을 다시금 훑어보며 생각해보니 이 말이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다고 본다. 처음에 읽었을 당시 정말 충격적이고 황당했을, 결코 ‘빛’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편지라고 하기에 무색할 정도로 짧디짧은 유디트의 편지가 시간이 흐르고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난 뒤 돌이켜보니 마치 태어나서 ‘세상의 빛’을 처음 봤을 때처럼 다시 태어나는 ‘계기’가 되어 주었다고 표현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작가의 자전적 성장소설이라는 평가를 생각해보더라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지 않는가.
두 번째 목차는 여행 중후반의 이야기. 주인공의 눈과 귀, 촉감을 통해 전하는 것들에 대한 세밀한 묘사와 대조들, 그리고 작가가 밝힌 집필의도인 ‘한 인간의 발전 가능성과 그 희망의 서술’. 작가는 주인공과 함께 떠나는, 계획도 정처도 없이 헤매며 방랑하는 것 같은 ‘긴 이별’을 위한 이러한 여행 ㅡ 위대한 개츠비의 작가 피츠제럴드가 자주 찾았던 앨곤퀸 호텔이 있는 뉴욕(그는 자신에게 변화를 독려하던 소설 위대한 개츠비를 생각하며 일부러 앨곤퀸 호텔에 머무른다. 그리고 이 호텔 근처를 걷거나 버스나 열차, 택시를 타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많은 회상과 회한, 질문과 혼잣말을 하고 진저에일이나 캘리포니아산 포도주도 마시고 영화와 뮤지컬도 보고 망상에 가까운 영상들과 환각들을 보고 지역마다 노랗거나 검은 택시 색깔도 본다.), 전 애인 클레어 매디슨이 살고 있던 필라델피아 서쪽 피닉스빌, 클레어의 딸 베네딕트를 데리고 세인트루이스 서쪽 록힐의 집에 살고 있는 ‘한 쌍의 연인’인 그녀의 친구 집으로 떠날 거라며 함께 가자는 그녀의 제안에 승낙하고 그렇게 셋이서 떠난 세인트루이스, ‘한 쌍의 연인’과 함께 본 영화 ‘젊은 미스터 링컨’의 감독 ‘존 포드’를 꼭 만나보고 싶어 하던 그는 그녀와 헤어지고 콜로라도 주 덴버를 거쳐 도착한 애리조나 주 투손, 솔트레이크 시티를 경유하여 해발 천 미터가 넘는 고지의 에스터케이더, 드디어 만나게 된 당시 76세가 된 존 포드가 살고 있던 벨에어 ㅡ 에서 갖가지 감정들의 흐름과 변화, 만나고 마주치는 사람들, 사물들과의 관계, 그리고 거기서 발견해 낸 모든 사소하면서도 중요한 것들을 보여준다.
초반에는 확실히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아내 유디트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영화 타잔을 보고 나오며 앞에 걸어가던 키 큰 여자에게 차 한 잔 같이 하자고 말을 건다. 함께 카페테리아에 갔다가 갑작스러운 두통으로 여자는 나가버린다. 그렇게 혼자 남은 그는 맥주 한 잔을 마시며 창밖의 사람들을 구경하다 옆 테이블의 신문을 읽게 되는데 기사들이 무척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 ‘연민’이 일어나고 신문에서 일어난 사건마다 ‘수긍’이 갔으며 기사 속 모든 이의 입장에 ‘공감대’가 형성되고 전혀 몰랐던 사람들과 장소들에 대해 ‘친근감’이 들기도 한다. 그러다 그 모든 것들이 일시적인 감정이라며 그것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킨다. 금방 사라져버리는 사람의 감정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며. 그리고 그는 밖으로 나가 거리에 서서 ‘다시 혼자가 되었다’고 말한다. 나는 여기서도 작가가 말하려고 하는 것을 조금이나마 이해해 보려고 애를 썼다. 어떻게 보면 그가 이렇게 생각했을 때는 긴 이별을 위한 여행의 출발점에 있었던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그것이 모두 일시적인 감정이고 그것에서 벗어나려 하고 ‘다시 혼자가 되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여행을 마친 후였다면 알 수도 있었을 ‘자신 안의 거짓된 목소리’라고도 할 수 있겠다. 여행 후 같은 일을 겪었다면 아마 그는 바로 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 수도 있다. 본래의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는 사실에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전체성’이나 ‘동질감’으로 행복을 느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당시의 그는 여행을 막 시작했으므로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나도 처음에 읽었을 때는 ‘웬 두통? 여자가 뭔가 마음에 안 들었나?’라는 단순한 생각만 했다. 그러나 재독 이후 큰 시점에서 다시 이들을 바라보니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두통이 있다며 여자가 나갔을 때 그는 이미 물리적으로 ‘혼자’였다. 그리고 그 때가 바로 존 포드가 소설 마지막 부분에서 말했던 ‘혼자일 때’였을 것이다. 그렇게 ‘혼자일 때’ 읽고 있던 신문에서 전혀 몰랐던 것들에 대한 ‘연민, 수긍, 공감대, 친근감’을 느꼈다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러나 그는 이내 솟아나온 ‘에고의 목소리’에 즉각 반응하고는 일시적인 감정이라 치부해 버리고는 밖으로 나가 거리에 선다. 에고에 침잠되어버린 그는 물리적으로 혼자가 아닌 다른 사람들과 거리에 서 있음에도 오히려 혼자가 되었다고 생각해 버린 것이다. 내 맘대로 해석이지만 내 나름의 퍼즐 맞추기 놀이 같아서 의도적이든 아니든 이렇게 할 수 있게 해 준 작가에게 다시 한 번 놀란다.
내 맘대로 해석을 했던 또 다른 내용들이 있다. 미국에서의 두 번째 날을 맞았던 그는 제퍼슨 가의 한 스낵바에서 진저에일을 한 잔 마신다. 그러고 나서 테이블의 뮤직박스에 25센트짜리 동전을 집어넣고 ‘부둣가에 앉아서’를 선곡하던 순간 알 수 없는 자신감에 찼다가 피곤이 몰려오면서 하품을 한다. 하품하는 순간 그의 안에 ‘공동지대’가 형성되어 칠흑 같은 ‘총림의 영상’이 채워짐과 동시에 유디트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고질병이 재발하듯 들었다고 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내가 생각하는 ‘전체성’ ㅡ 혹은 해설서에 쓰인 ‘어우러짐’ ㅡ 이 그에게서 발현되려다가 ‘에고’의 등장으로 불가능해졌음을 느꼈다. 그리고 시간과 돈, 방향감각에 대한 관념이 너무도 다른 그와 유디트의 대화를 보면서 시간과 돈은 정말 상대적임을 다시 한 번 느꼈고 그들의 대화를 회상하던 그가 기억이라는 것이 이렇게 우스꽝스러운 것이었다고 한 부분에서 크게 공감했다. 확실히 기억은 과거와 미래를 혼란스럽게도, 왜곡시키기도, 사람을 오도하기도 하여 현재를 불행하게 만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스낵바에서 나온 그가 마주친 한 학생을 보고 개별적인 인간들에 대한 이야기를 부쩍 읽고 싶어진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는데 나는 이 이유를 바로 밝혀주지 않은 작가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그 이유가 너무 궁금해서 소설을 다시 읽어보며 나름의 퍼즐 맞추기로 실마리를 찾아보았다. 다행히 어렴풋이 얻은 것 같기는 하다. 물론 정답은 아닐 것이다. 화자가 받는 인상들은 이미 자신이 알고 있고 익숙한 것들에 대한 인상의 반복일 뿐이고 불안 상태에 대한 기억만 살아있다. 그 이유는 그가 매일같이 보이는 대로 보고 들리는 대로 듣는 그런 반복된 관념과 관습에 사로잡혀 비교해볼 대상을 가진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세상을 많이 돌아다니지 못했다는 것도 그렇지만 자신과 다른 조건들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지 못했기에 그는 그 불안 상태를 떨쳐내고 싶어서 비교 대상을 찾기 위해 개별적인 인간들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싶어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아마 작가도 소설의 마지막에 화자가 존 포드와 만났을 때 ‘존 포드가 이야기를 시작했다’며 그의 생각이나 견해는 새롭지 않았지만 그가 그런 견해를 갖게 된 ‘계기’와 보편적인 것에 관한 질문에도 비약을 해서 ‘개별적인, 특히 개별적 인간에 대한 이야기로 방향을 틀어갔다’고, ‘언제나 자신과 관련이 있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가치 평가 없이 이야기했다’고 서술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존 포드가 ‘적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로서는 굉장히 불편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적을 가질 수밖에 없긴 하지요.’ 라고 말한 부분과 ‘사람들한테는 누구나 다 갑자기 자기 자신을 느낄 수 있는 행동들이 있게 마련이지요. 그럴 때면 그래, 바로 이거야!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런 기분이 들 때 ‘혼자일 때’ ㅡ 위에서 내가 연결시켜 보았던 바로 그 때 ㅡ 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남들이 보는 앞에서 다시 그와 같은 일을 시도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한편으로는 다시 자신을 잃어버리게 되기도 합니다. 어딘가 모르게 연출된 듯한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지요. 그건 불행한 일이에요. 웃기는 얘기입니다.’ 라고 말한 부분과 클레어가 살고 있던 필라델피아에서 그들의 최종 목적지, ‘한 쌍의 연인’인 그녀의 친구 집이 있는 세인트루이스로 가기 위한 여정 중 첫 경유지인 피츠버그 남쪽 도노라로 가는 길에 오후 늦게 잠시 정차했던 주유소에서 불이 켜지는 순간 그가 데자뷰 현상을 느끼며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고 더 이상 원래의 자기 목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는 상태가 되었다고 생각하며 클레어에게 말하는 부분이 있다. 예전에는 단지 고통스러운 기억만 떠올렸지만 이제야 활력 넘치는 추억 같은 걸 발견했다고. 자신이 느꼈던 최초의 작은 희망을 다시 몽상 같은 것으로 폄하하고 싶지 않다고, 사물을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없고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이 타고난 그의 본성 때문이 아닌 상황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감각이 둔감해졌거나 그 순간 마음이 내키지 않아서라는 것을 스스로 확인하기 위해서 오히려 그런 기억들을 일부러라도 떠올리려고 한다고. 이 때부터 그는 버리고 싶었던 에고로 덮여 있던 과거의 자신을 변신시키고 싶어 했다고 생각한다. 그런 욕망을 순간적인 감정이라 여기지 않고 미래에 대한 기쁨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그는 그 미래 속에서 지금 이 순간 존재하는 나와는 다른 누군가, 즉 본래의 자신이 되고 싶어 하기 때문에 미래 속에서 살기 위해 시간이 흘러 얼른 나이가 들었으면 좋겠다고 까지 한 걸 보면 말이다. 또한 그렇게 일몰 직전에 도노라의 한 호텔에 도착한 그는 평지처럼 보이는 언덕바지 위로 하얀 미광을 드리운 구름을 보던 순간 혼동과 감각의 현혹에서 메타포가 생겨나는 이치를 깨달았다고 생각한다. 옛날 사람들이 자연현상을 대할 때 ‘나의 온 존재의 활동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는’ 식으로 자연과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는 이치를 말이다. 그러나 그때 당시 그의 여행은 여전히 초반부나 다름없었기에 그가 분명한 불쾌감을 느끼고 만다. 오후 늦게부터 일몰 직전까지 깨달았던 소중한 이치를 얼마 안 가 어두컴컴해질 때쯤 거부하는 모습을 보이는 부분을 읽었을 때에는 위에서 내가 생각했던 ‘에고’를 버리지 못하는 나를 포함한 사람들에게 하는 말인 것 같았다. 우리가 에고를 버리기만 한다면 적을 갖지 않을 수도, 우리가 느꼈던 최초의 작은 희망을 몽상 같은 것으로 폄하하지도 않을 수도 있는데 그걸 잘 못하기 때문에 적을 가질 수밖에 없고 에고를 버리고 온전히 자신을 느낄 수 있는 행동들을 할 때가 있는데도 하필이면 그럴 때는 ‘혼자일 때’가 많아서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똑같은 행동을 해도 그와 동시에 에고가 발동해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역할을 연기하는 모습이 나오며 자연의 이치를 깨닫는 순간들이 와도 잠시뿐 금세 에고에 잠식되어 그 이치를 역사, 사회적인 관습과 개인적인 과거에서 묻어나온 생각과 판단으로 헛소리라며 거부해 버리는 것은 아닐까. 이상 내 맘대로 해석한 내용들이었다.
위에서 내 맘대로 해석해 본 대목들은 기본이고 아래에 나올 대목들도 나에게 의식의 전환을 가져다 줬다. 도노라 이후의 목적지인 인디애나 주 인디애나폴리스의 한 호텔에서 화자는 언덕마루에 서 있는 한 그루의 실측백나무를 관찰하게 된다. 그러다 그 나무의 존재도 자신의 존재조차도 잊어버린 채 바람에 가볍게 이리저리 흔들리며 서로의 호흡이 맞닿고 서로가 하나가 되는 것을 감지한다. 그렇게 저항하기를 그만두고 실측백나무의 품 안에서 자신을 흔들리게 하고서 마침내 잉여의 존재가 되자 자신의 안에 있던 살인마 같은 태연함도 해소 되고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언제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들과 궁금증들이 명료해지고 시간도 빨리 지나가는 체험을 하게 된다. 바로 그날 밤 인디애나폴리스의 워런 공원에 앉아 클레어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시 호텔로 돌아온 그는 허기가 느껴져 요기를 한다. 옆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클레어를 보며 예전 그녀와의 만남을 반추하던 순간 그의 눈앞에 다른 시간,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방금 전에 체험했던 실측백나무의 놀이에서처럼 자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천국 같은 삶을 강렬하게 느꼈고 그 ‘텅 빈 세계’ 앞에서 강한 전율을 느낀다. 그 세계는 불안에 취약한 그의 성격과 허약함을 떨쳐내기 위해 그냥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곳이다. 그 곳에 들어간 이상 그는 예전처럼 자신과 다른 세계관을 가친 사람이 존재한다는 생각만으로도 현기증이 나고 자기 중심적 사고에서 비롯된 메스꺼움을 느끼지 않는다. 대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클레어에 대한 깊은 연민을 느끼며 ‘얼마나 불행한 여자인가!’라고 생각한다. 나는 아직 그런 체험을 해 본 적이 없어서 궁금하기도 하고 나도 그런 체험을 해 보고 싶다는 소망은 있다. 그러면 일상생활에서 시시때때로 불어 닥치는 폭풍 같은 사건들과 골칫거리들을 문제들로 규정하지 않고 사소한 말 한마디, 표정 하나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싶어서이다.
만나봐야 그다지 좋은 일이 있을 성싶지 않다던 유디트가 마치 그녀를 찾아오게 하려는 듯 그에게 단서들을 보내고 그는 유디트와 만나서 영화감독 존 포드를 함께 만나러 간다. 그들의 개별적인 이야기를 들려주고 영화로 제작하게 하려고 해서였을까. 아니면 그런 것을 염두에 두고 작가가 그렇게 구성을 한 것일까. 어찌됐든 존 포드의 집에서 그들은 많은 대화를 나눈다. 특히 유디트와 존 포드와의 인터뷰 형식의 대화에서 아! 이거구나 하는 문장들이 많았다. 왜 항상 ‘나’ 대신에 ‘우리’라는 말을 사용 하냐는 유디트의 물음에 존 포드는 미국인들은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이 함께하는 공적인 행동의 한 부분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이것 또한 ‘어우러짐 혹은 전체성’의 의식에서 나온 이유 같았다. 무엇인가 행하는 모든 것이 그저 개인적인 내가 행하는 것이 아니라 공적인 행동의 한 부분으로 작용하는 거라니. ‘나’는 없고 ‘우리’는 있다는 말 아닐까. 그 ‘우리’라는 것 안에 ‘나’도 있기는 하지만 나 따로 우리 따로가 아니라 ‘우리’가 먼저 있고 ‘나’는 그 안에서 개별적으로 어우러지고 전체를 구성하는 하나의 생명체라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래서 그는 고작해야 회상할 만큼 오래되지도 않은 자신의 경험에 대해,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는 자신이 보는 앞에서 다른 사람들이 겪었던 것을 말하기를 좋아하고, 자신이 직접 겪었던 일보다는 할 수 없었던 일이나, 가보지 못했던 곳에 대해, 살아보지 못한 시대를 배경으로 하여 영화를 만들려고 하는 것이라고 한 것 같다. 이는 ‘개별적인 것’들 간의 비교를 위함인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그는 우리가 의식을 깨워 모든 것이 자연으로 환원되던 시대로 돌아가 자신의 현존까지도 잊어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상태로 존속하여 태곳적부터 살아온 삶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역사라는 개념을 잊은 영원의 느낌을 잊지 않으며. 이런 사람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우리는 억압된 에고의 욕망을 자꾸 불러오는 ‘과거’에 대한 ‘회상’과 ‘집착’, 그리고 그로 인한 현재의 ‘판단’을 떨쳐내고 에고라 할 수 있는 ‘자아’와 허상이라고도 할 수 있을 ‘실존’에 대한 고민과 번뇌에서 벗어나 우리 본연의 자신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된 ‘녹색의 하인리히’와 ‘안톤 라이저’도 꼭 읽어봐야겠다. 이제 이 책에 대한 나의 마지막 정리를 하겠다. 유디트가 화자와 어느 정도 애증의 관계였는지, 비뚤어진 에고의 애정표현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기이할 수 있는지, 순간순간 휘몰아치는 생각들과 사념들이 얼마나 가변적이며 되돌아 봤을 때 우습기도 하고 후회가 되기도 하는지 등은 일상적이고 주변적이지만 정말 필요한 것들이기도 하다. 실측백나무의 놀이에 연이어 텅 빈 세계의 출현을 체험한 날 밤 그가 생각했듯이 이런 것들을 겪어 봐야 콤플렉스들이라 할 수 있는 것들에서 아예 벗어나려고 하지 않고 ㅡ 그것 또한 에고의 발현일 수도 있기에 ㅡ 그것들을 배려하는 방법이나 자신에게 적합하면서도 남들 또한 나를 정당하게 평가할 수 있도록 하는 그런 적절한 생활방식을 찾아내는 것의 중요함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법이나 중요함을 알게 되기까지의 ‘예행연습’이라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을 깨닫기 전까지 겪었던 ‘모든 것들’이다. 그리고 내게도 그런 날이 오기를 바란다.
이 책은 ‘너와 나의 다름과 차이의 개별 논리’에서 벗어나고, ‘변화’와 ‘과거와의 이별’을 통해 ‘에고인 나’와 ‘내 안의 타자’와 화해하고, ‘닮음’과 ‘어우러짐’의 ‘공존가치’에 주목하고, 극복과 치유의 길을 나설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러나 만만치 않은 어휘들과 문장들, 그리고 꿈과 환상과 같은 표현들에서 헤어 나올 수 있어야 한다. 자칫하면 그것들에 휩쓸려 내려가 한없이 우울해 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에 그랬듯이. 그러나 마지막까지 흐름을 놓치지 않고 자연스럽게 따라가다 보면, 혹은 다시 읽어가다 보면 알게 될 수도 있다. ‘사실’은 ‘픽션’에서 나올 수도 있고 ‘픽션’이 ‘사실’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텅 빈 것’에서 ‘온전함’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개별적이고 특별하지만 서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완전히 독립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과연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을, 그렇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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