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eminemmiri님의 서재
  • 어두운 밤 나는 적막한 집을 나섰다
  • 페터 한트케
  • 7,200원 (10%400)
  • 2001-01-31
  • : 317
어두운 밤 나는 적막한 집을 나섰다 – 페터 한트케
어둠과 적막함. 부정적이고 암울한 단어 같지만 본질과 내면을 꿰뚫어 보면 중요하고 필요하며 진정한 내면의 평화를 찾을 수도 있을 공간의 완벽한 조건이 될 수 있다. 폭풍 속에서도 어떤 혼란스럽고 시끄러운 상황 속에서도 고요함과 내면의 빛을 지킬 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어둠과 적막함 속에서 지극한 그것들을 발견해 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 대한 리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화자의 에필로그를 포함하여 235쪽밖에 되지 않는 글 안에 이토록 많은 것과 환상, 환각적, 편집증적이고 심지어는 자아분열적이라고까지 생각이 들지만 결국에는 자조적이고 달관적인 생각들과 시각들을 담고 있음에 놀랐고 이 책을 한 번 읽고 리뷰 쓰는 것이 나에게는 너무 벅차고 불가능하다고 생각이 들었기에 재독을 하면서 솔직히 마음속에 짜증이 일기도 했음을 고백하고 싶다. 처음에 읽고 난 후 책을 덮고 느낀 점을 써 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떠오르는 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말도 안 되는 내용들이 뒤죽박죽 엉켜 있는 상태였고 느낀 바도 거의 없이 ‘그냥 난해하고 복잡한 내용’이라는 것만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리뷰대회가 아니었다면 평소 나의 리뷰 방식대로 책 앞 속지 빈 공간에 대충 어려웠으며 환각적인 요소들이 많았다는 대략적인 내용으로 마무리하고 말았을 것을 리뷰대회에 참가하기로 한 이상 이대로 끝낼 수는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시간은 촉박한데 눈물을 머금고 재독할 생각에 짜증이 났다. 그러나 한트케가 난해한 작가라는 선입견 없이 읽는다면 아주 유쾌해질 수 있을 거라던 추천사를 무작정 믿어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책 속에서 계절마저 그에게 혼란을 일으켰던 것처럼 내게 큰 혼란을 안겨 준 이 책을 사랑하기로 하고 재독 후 리뷰를 쓰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정말 안타깝게도 나는 지금도 명확한 줄거리를 잡지 못 했고 느낀 점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기에 내가 화가 났을 때의 심정과 비슷한 상태이기는 하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는 게 나의 최대 무기이자 장점이므로 마음을 가다듬고 책 여기저기 표시한 곳들을 앞뒤 여기저기 들춰가며 리뷰를 작성할 각오로 시작한다.
어느 여름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던 날 저녁, ‘울타리 단지’ 또는 ‘잃어버린 섬’에 있는 ‘독수리 약국’에서 일하던 한 남자가 계획도 의도도 없이 여행을 떠나게 된다. ‘탁스함 약사’였던 ‘그’는 자주 가던 지하식당 손님들 중 세찬 빗줄기 속을 산책하듯 걸어가던 남자 둘을 우연히 자신의 차에 동승시키면서 시작된 여행이었다. 여유 있게 차를 모는 ‘운전기사’가 된 그는 뒷좌석의 두 사람과 단 한 마디의 말도 없이 그들에게 충분히 있었던 시간 덕분에 목적지도 없이 시작한 여행 도중에 과부인 여인숙 여주인을 만나는데 그는 ‘승리자’인 그녀에게 이유 없이 가혹한 구타를 당한다. 나중에 알고 보면 이 구타는 승리자인 그녀의 남편이 죽기 훨씬 전부터 그녀가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된 남편 아닌 누군가를 다시 한 번 열렬히 사랑될 사람에게 가할 행동이었음이 밝혀지는데 이 구타가 나는 전혀 이해가 안 갔다. 구타를 함으로써 그에게 호감을 표시한다는 것도 그렇고 그것을 나중에 알고 나서도 그대로 수긍하는 그의 태도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작가는 이런 식으로 당연한 것은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 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 본다. 그렇게 수많은 터널들을 지나며 여행을 계속하는 그들의 여정에서 그들이 체험한 것은 세 사람 다 제각각 기분은 다르더라도 그들이 처한 상황이나 그들의 의식이 서로 비슷했기 때문에 여행을 한다는 것은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새롭고 엄청나게 흥미 있는 일이라는 사실이었다. 우리도 이와 똑같지 않을까. 삶이라는 여정을 지나오며 겪었던 것들에 대한 기분은 제각기 다르지만 그럼에도 앞으로의 삶은 여전히 새롭고 흥미 있을 거라는 사실이 우리들의 희망이기 때문에. 그리고 속도와 관계를 맺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라고 말했던 예전의 스키 영웅의 말에도 공감이 갔다. 최대한으로 가능한 속도에 단호히 나 자신을 내밭긴 채가 되어서야 비로소 진정한 나 자신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의 속도에 맞추지 못 하거나 거스르려고 할 때의 우리는 얼마나 고통스럽고 안쓰러운 상태인지 알지 않는가.
드디어 마지막 터널을 통과한 후에 만난 스페인의 상상의 도시 ‘산타 페’에 도착한 세 사람. (터널들을 통과했다는 것을 책을 처음 읽을 때에는 인지하지도 못 하고 있었다. 그러나 재독했을 때에서야 터널들을 통과하며 여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 그 터널들 또한 가상의 공간이었을 것이다.) 그곳에서 펼쳐지는 축제를 관람하게 되는데 관객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시인은 잃어버렸던 딸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녀는 ‘만인을 위한 존재’인 축제의 여왕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어린 여왕인 딸은 경찰관 두 명에서 체포되어 끌려간다. 그리고 시인과 그의 친구 스키선수도 경찰차를 타고 사라지게 된다. 그 또한 축제행사에서 또래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도둑질 놀이를 따라하다 경찰에 체포되어 간 아들의 얼굴을 때린 이후로 그가 쫓아낸 것과 다름없이 집을 나갔던 아들을 발견하는데 아들은 축제 행렬에서의 악사들 중 한 명으로 아코디언 연주자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둘은 서로에게 한 번도 알은체를 하지 못하고 그렇게 스쳐간다. 신기하면서도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은 그의 이 날 사건에 대한 회고였다. 아들이 금세 눈앞에서 사라져버린 것부터 그곳에서 겪었던 그 모든 것이 자신에게 조금도 불행하게 여겨지지 않았고 ‘다 그런 거지!’라고 생각하고 말았다는 것. 그러나 그 이후에 ‘중요한 것은 거기 밤바람 불어오는 야외에서 사람들과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이라는 말을 읽은 후에야 조금 이해할 수는 있었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는 과거로 묻어두고 ‘현재’에 충실하고자 했던 그의 의지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이야기꾼인 그와 시인, 그리고 전 스포츠 스타 세 명은 ‘산타 페’에 계속 머물면서 비슷한 방식으로 실제로 일을 시작한다. 스텝 지역의 노천 주점을 겸하는 여인숙의 원래 운영자였던 시인의 딸이 체포된 후, 그 낡은 여인숙에 관련된 일들을 각자 맡아서 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과부인 여인숙 여주인을 찾아 나서고자 한다. 그의 추적이 시작되면서 그는 까마귀 주둥이에서 떨어진 것으로 생각되는 ‘사과’에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적도 있고 먹이를 통째로 삼켰던 부엉이가 뱉어낸 ‘생쥐의 털’이 머리에 가볍게 스쳤을 때도 있다. 이 머리에 가해진 가격은 소설 초반부 ‘숲속에서의 일격, 깜깜한 어둠 속에서의 일격’과도 연관이 있어 보인다. 그런 순간에 분명해지는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바로 그가 ‘완전히 변화된 존재가 되기를 끈질기게 강요하는 이 새로운 상황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는 갈망’이다. 마침 이러한 갈망은 현재 나에게도 너무 필요한 것이었다. 물론 완전히 변화된 존재가 되는 건 불가능할 수도 있지만 그것을 끈질기게 강요하는 상황은 계속 밀려오기에 그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정말 중요한 일이라는 걸 갈수록 실감하고 있기에, 그리고 그것 때문에 며칠 밤을 거의 잠 못 자며 글로 풀어보려고도 해 봤고 주위의 믿을만한 사람들, 나를 지지해 주는 사람들과의 대화로도 풀어보려고도 해 봤지만 완전한 해결책은 그것에서 찾지 못 했기에 나에게 더욱 절실한 것이라 더 크게 다가왔다. 그 갈망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서 나에게도 일격이 필요할까.
후각이 특히 발달한 우리의 화자인 그는 ‘늘 코를 벌름거리고’ 있어야 한다며 매순간 무언가를 ‘재발견’하기 위해 몰두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재발견이라는 것은 첫 번째, 중세 서사시를 읽은 그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승리자’가 된다는 것은 지금 현재의 ‘실패자’에게 정해진 운명이기에 ‘승리자’는 처음부터 ‘실패자’였으며 서사시에서의 모험이 무사히 끝나면 ‘패배자’가 마침내 ‘승리자’가 되는 것일 수도 있고 스텝 지역의 식물계에 있는 전혀 다른 것을 다른 의미의 ‘에센스’로 이해하게 되는데 ‘텅 빈’ 라벤더의 뼈대에서 ‘아주 강한’ 라벤더 향기가 나고 ‘빈’ 야생 양귀비 껍질에도 양귀비 냄새가 ‘아주 진하게’ 남아 있었다는 것일 수도 있다. 두 번째, 수천 개의 길들을 말을 타고 어디든 달려야 모험이 끝날 수 있다는 것과 ‘그의 여정을 통틀어 태고의 거대한, 가장 큰 짐승’은 고슴도치 한 마리임을 알게 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세 번째이자 결론적으로, 그가 실어증에 걸린 것처럼 벙어리가 되어 버렸던 순간들과 비교되어 더욱 분명히 인식 되는 모든 ‘이야기하기’와 그의 일상생활의 반경이었던 ‘울타리 단지’ 또는 ‘잃어버린 섬’에서 벗어나 있으며 광활한 상상의 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스텝 지역’이 하나가 되어 모든 것을 새롭게 발견하고, 변화를 만들어내고, 예리하게 주변 상황을 파악하고 조금도 정신을 팔지 않은 상태로 눈을 들어 ‘독수리의 눈으로 본다’는 의미에서의 우러러보도록 하여 안과 밖이 서로 파고들어 완전히 일체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과 스텝 지역의 풍부한 식물, 광물들 중에서도 버섯을 기가 막히게 찾아낸다는 그가 인류의 마지막 공통적인 대화 주제는 천차만별의 버섯 종류들이 될 것이며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가능한 공통의 모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내 입장에서는 화자가 말한 ‘재발견’이라는 것들이 온전히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언뜻 알 수도 있을 것 같다. 첫 번째에서는 ‘승리’와 ‘실패’, ‘텅 빈’것에서 나오는 ‘(무에서 유가 창조되는 것처럼)아주 강하고 진한 에센스’의 역설, 두 번째에서는 당연하게 여기던 것과 당연하지 않게 여기던 것들 사이의 경계와 혼란, 현실과 상상을 넘나드는 생각의 필요성 같은 것들 말이다. 마지막으로는 문득 들었던 생각인데, 스텝 지역에서 겪었던 환상 같은 모든 경험들이 그의 이야기로 만들어지는 것처럼 이야기는 환상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야기’는 ‘사실’과는 다르다. ‘사실’은 중립적이지만 ‘이야기’는 개인적이고 상대적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실’에 근거해서만 살기보다는 ‘이야기’를 만들어냄으로써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우리에게 고통을 줄지언정 종국에는 성장시키고 발전시키기 때문이다.
그렇게 ‘늘 코를 벌름거리고’ 있어야 매순간 무언가를 ‘재발견’하기 위해 몰두해야 한다고 말했던 그는 그의 도서관이라고도 할 수 있는 광활한 스텝 지역을 가로질러 가면서 더 이상 아무것도 찾지 않는 나날이 왔는데 그 이전에 수많은 탐색 과정들(까마귀, 고슴도치 / 버섯 / 야생국화, 아니스, 라벤더, 양귀비 / 나비, 개미, 말벌, 말메뚜기, 나방, 벌들에 대한 관찰)이 있었기에 아무것도 찾지 못해도 자유로움을 알기에 비로소 ‘자유’를 얻었다는 대목에서는 아! 이거구나! 싶었다. ‘과유불급’을 제대로 느낄 수 있으려면 지나치리만큼 몰입도 해 보고 행동을 해 봐야 거기서 오는 인생과 삶의 고통을 느낄 수 있고 상처도 입고 좌절도 하고 이래저래 크게 데이며 자아 정체성의 혼란도 겪어 봐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아무것도 하지 않음’에서 발견할 수 있는 지혜와 행복, 기쁨, 평화를 체험하게 되면 욕망과 갈망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비로소 만끽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그는 어느 느지막한 오후, 햇빛이 쏟아지면서도 선선할 때 민둥산이나 다름없는 작은 점톳빛 언덕기슭에서 바람이 들지 않는 곳을 찾아 쉬다 두 언덕 사이에 팬 얕은 굴 바닥에서 쉬고 있었다. 그 바닥에 누워 있다가 손에 닿을 듯 가까이에 있는 점토벽에서 ‘벽감’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지친 눈을 쉬게 하면서 천지창조부터 태고의 산맥, 아득한 선사시대의 산비탈, 현세의 전쟁들, 스스로 찬란히 빛나는 것, 빛의 근원, 가지각색의 노란색으로 변화하는 점토, 구현된 빛, 사랑하는 조상들,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 도마뱀, 귀뚜라미, 그와 똑같이 생긴 도플갱어, 그를 겨냥하는 사냥꾼, 메뚜기, 허니문 자동차로 꾸며진 산타나 지프차, 그 차를 운전하던 아들과, 아들의 신부가 된 시인의 딸인 축제의 여왕까지 목격한다. 엄청난 과거의 이야기들과 망상이라고까지 할 수 있을 환상들이다. 이 모든 이야기들과 환상들을 체험하고 난 후 그는 비로소 버섯 아래의 텅 빈 지하 세계, 점점 더 짙어가는 어둠 속, 끝없는 심연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느낌이 들면서 ‘죽음의 땀’이 쏟아진다. 이 ‘죽음의 땀’이 별 게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나는 이렇게 받아들였다. 그의 현실 세계인 자투리 세계에서 걸어 나와 가상의 세계라고 할 수 있을 광활한 스텝 지역으로의 여행을 끝내는 하나의 의식으로서 물끄러미 ‘벽감’ 바라보기로 모험을 완성하고 난 후 스텝 지역에서 점점 빠져 나오며 자투리 세계로의 귀환을 위한 하나의 의식으로서 이 ‘죽음의 땀’을 흘리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스텝 지역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보다 그곳에서 빠져나와 거의 텅 비어있거나 점점 좁아지고 뾰족해지며 작아지는 자투리 땅 위로, 즉 ‘자연에서 빠져나와 대도시로 접어드는 행군이 더 큰 모험이며 완전한 모험기’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현실 세계, 자투리 세계에 도착하고 나면 스텝 지역으로의 여행 이전에는 결코 시도할 수 없었으며 애써 기피해오던 것을 직면하고 그것에 도전하며 자연에서 얻은 여유와 마음의 공간을 찾게 됨에 따라 그가 흘렸던 ‘죽음의 땀’이 식어가며 전율이 일 듯 몸이 떨리게 되는 건 아닐까. 그것은 과거와의 화해를 상징하는 과거 자아의 죽음으로 흘리는 땀 같은 아니었을까.
‘역설과 대조, 망상과 환상, 끊임없이 이어지는 인간계를 비롯한 천지계, 식물, 동물, 사물계에 대한 관찰, 시공간 초월’의 내용이 대부분인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내게 좋은 기회였고 끝까지 읽은 것과 재독한 것은 힘든 도전이었다. 리뷰 초반에 고백한대로 ‘화’와 ‘짜증’으로 시작했던 내 감정이 이 리뷰를 작성하며 다시 한 번 책을 훑어보는 중간 과정과 끝을 향하고 있는 지금은 ‘작은 알아차림’과 그것으로 인한 ‘고마움’으로 변해 있다. 이를 보면 우리의 화자가 잘츠부르크 공항의 숲가에서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의해 일격을 당하리라는 것을 전부터 반쯤은 의식적으로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나중에야 깨달았듯이 아마 나는 페터 한트케의 암호와 같은 언어들에서 일격을 당하리라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리뷰 중반에 썼던 ‘완전히 변화된 존재가 되기를 끈질기게 강요하는 이 새로운 상황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는 갈망’을 이미 제대로 느끼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렇다. 나는 정말 완전히 변화된 존재가 되고 싶지만 그것을 강요하는 상황과 세상에 거부반응과 자기방어기제, 심하게는 자기합리화까지 내세우고 있었던 것을 인정해야겠다. 그 배후에는 이기적인 자아도 있을 수도 있고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의 일면일 수도 있다. 완전히 변화된 존재가 되는 것이 얼마나 힘들지 안다고 생각해 왔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꼭 그런 것도 아니다. 화자도 그런 ‘알 것 같으면서도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고뇌하다가 결국 ‘모든 것을 포용하고 초월하는 모습’들을 보여준 걸 보면 내게도 그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고 ‘그냥 그런 것’이라고 알려주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그가 서술자와 이야기를 나눈 에필로그에서 그는 그의 스승 파라켈수스의 말대로 ‘귀중한 것을 눈앞에 목격한 자는, 바로 그 순간 벌써 또 다른 귀중한 것으로 눈길을 돌린다’고 말했던 대로 본질적으로 달라지기 위해서라면 어느 곳에 서 있든, 어느 곳을 걷고 있든 ‘다음의 모험을 위한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며 그 ‘출발점’을 되찾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다 내줄 수 있을 거라고 했듯이 아마 나도 그 ‘출발점’을 찾아 ‘모험’을 떠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이런 완전한 모험기는 다른 어떤 것도 아닌 ‘그냥 사랑 이야기’와 ‘모험 이야기’가 되어 말이 아닌 글로 기록해야만 하며 그 이야기들에는 반드시 ‘멈추다’라는 단어를 첨가해야만 할 것이다. innehalten. ‘완수하다, 유지하다’의 의미를 가진 이 아름다운 독일어 단어가 가진 힘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의 모험을 ‘완수’하더라도 또 다른 모험을 할 준비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에필로그의 마지막쯤에서는 화자의 존재가 우리가 흔히 생각하고 보는 그런 인간형상의 존재가 아닌 그 존재를 넘어서는 자기 안의 또 다른 존재를 알아채고 그 존재가 자연으로 모험을 떠나게 하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화자가 서술자에게 “누군가가 나가고, 집 안은 적막해졌소. 하지만 아직 뭔가가 부족하오. 나는 아직 어느 특정한 문이 잠기는 소리를 듣지 못했소.”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그랬는데, 이 부분을 몇 번이고 다시 읽어보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 봐도 처음에는 도통 이해가 안 갔다. 그러나 공허해 보이는 이 문장들이 분명히 ‘에센스’를 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나의 특유의 집요함으로 이 문장들에 파고들어 볼 생각으로 리뷰를 거의 마무리하는 단계에서 처음부터 다시 읽어 내려오다 보니 내 나름대로 알 것 같기도 한 것을 알아냈다. 그것은 바로 이것이다. 내가 무언가에 집착하게 하고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 하게 하는 자아는 나의 본질이 아니기에 ‘진정한 나라고 할 수 있는 존재’가 모험을 떠나기 위해 ‘좌절하고 무력해진 자아’를 상징하는 ‘적막한 집’을 나선다. 그 존재가 모험에서 탐험하는 것들은 모두 ‘이루 말할 수 없이 자유로움’ 속에서 그 존재와 관계를 맺고 ‘이루 말할 수 없이 서로 사랑’한다. 이 모험의 ‘완수’는 한 번으로 충분하지 않으므로 나의 생각들과 육체가 현존하는 한 끝나지 않는다. 이를 위해 그 존재는 문을 잠그지 않기에 끊임없는 모험을 ‘유지’하며 모험을 다녀올 때마다 나의 육체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경탄’ 속에서 깨어날 수 있게 된다.
바로 거기서, 그 모험에서, 다채롭고 다양한 모든 생명들이 존재하는 광활한 스텝 지역에서, 거대한 자연에서, 현실 세계가 아닌 주변부에서 우리는 잠시 동안이라도 자신에게 경탄하고 감격할 수 있고 그 감각이, 그 작은 알아차림이 이 작디작은 자투리 세계, 현실 세계에서 살아가는 힘을 준다. 어쩌면 자아를 끝까지 놓지 못할 나의 생각들과 육체에게.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