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는 은빛 산책로를 통해 들어오고, 금빛 산책로를 통해 나가지.” - p. 236
'할머니의 할머니, 그리고 그 할머니의 할머니로부터 전해 들은 할머니표 이야기.' 이야기 전달자들은 다만 그렇게 별이 빛나는 하늘 아래 속삭이듯 이야기를 건네었다. 어린 페트라에게 오기까지 입과 입을 거치며 조금씩 달라지는 모양 속엔 그들만의 시간과 세계가 오롯이 담겨 있다. 그렇게 수없이 갈라지고 거듭 퍼지면서, 이야기는 상상도 못한 곳까지 뻗어나간다. 그럴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기도 하면서.
“이야기 전달자, 그래. 그건 네 핏속에 흐르지.
하지만 그냥 나처럼 되고 싶다고?
아니, 아가. 넌 네가 누구인지 알아내야 해.
그리고 알아낼 거야.”
p.12
이건 페냐 가족의 첫째 딸이자 가족과 함께 지구를 떠나도록 선택받은 아이, 페트라 페냐의 이야기다. 줄곧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할머니처럼 되고 싶었던 페냐. 그것들을 소중히 간직한 채 이제 자신만의 이야기를 펼쳐나가야 하는 기로에서 페트라는 더없는 두려움을 느낀다. 이제 수백 년의 미래와 미지의 우주를 뛰어넘는 여정의 장 앞에 페트라와 가족들이 서 있었다.
"···이건 새롭게 시작할 기회야. 일치."
"지금 이 순간부터, 우리는 새 역사를 창조할 수 있어" - p.72
기억과 이야기, 그리고 가족. 페트라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그 모든 소중한 것들은 우주선에 탑승한 바로 그 때부터 흔들리기 시작한다. '평화와 평등, 일치'를 주장하는 '콜렉티브'에 의해서였다. 파괴될 예정의 지구를 뒤로하고 아예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고자 하는 '콜렉티브'가 이끄는 우주선에 탑승한 사람들. 그들이 마주하게 될 현재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수백 년의 무의식 혹은 잠깐의 낮잠 뒤에 과연 그들이 꿈꾸던 새로운 삶과 세상을 맞이할 수 있을까?
여느 SF문학에서 볼 수 있듯, 지구를 떠나 새로운 행성으로 이주하는 어느 주인공의 여정을 그린 이 이야기는 그러나 페트라의 여정이 되면서 '이야기(쿠엔토)'라는 끈으로 또 다른 형태로 엮여 나간다. 덕분에 이 이야기엔 모험과 용기, 싸움과 평화가 더욱 생생하게 빛을 내며 눈꺼풀 대신 마음을 자연스럽게 끌어당긴다. 어차피 지워지고 허황된 것이라며, 누군가는 보잘 것 없이 여길 무언가를 어떤 이는 당당하게 딛고 선 채 차오르며 나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마지막 이야기 전달자, 제타4가 아닌 페트라의 이야기다.
페트라처럼 기억과 이야기, 가족 같은 것을 좋든 싫든 끌어안고 살아온 또 다른 사람으로서 나는 당연하게도 그와 동시에 웃고 글썽이고 분노하며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었지만, 나 또한 쿠엔토 앞에서 그저 눈을 반짝이고 있기도 했다. 다음 문장과 장면을 재촉하면서. 그건 블랑카플로르, 이즈타와 포포카, 노부부의 이야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다만 페트라의 이야기 때문이었을까. 그 순간의 기억은 벌써 흐릿해졌지만, 어쨌든 이야기 때문이었다. 그런 반짝임들로 이 책을 기억할 것 같다.
※ 이 책은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읽고 주관적으로 쓴 글입니다.
"이야기 없는 세상은 죽은 거나 마찬가지야."- P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