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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상 스케치
  • 사슴남자
  • 마키메 마나부
  • 10,800원 (10%600)
  • 2009-03-01
  • : 93

4년 전, 일본의 나라(奈良) 현에 처음 갔을 때 봤던 광경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달리는 자동차도 멈추게 하는 사슴들 때문이다. 주위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유유히 길을 건너는 사슴의 도도한 자태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나라의 사슴은 여름철이라면 특히 주의해야 한다. 수사슴의 뿔 때문인데, 관광객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만다. 그 거대한 뿔로 위협하며 먹이를 재촉하는 야생의 모습은 식은땀이 흐를 정도다. 그럼에도 나라에서 사슴을 빼면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나라 사람들은 사슴을 신성시한다. 하고많은 동물 중에 왜 하필 사슴인 걸까?

 

신화적인 측면에서 사슴은 나라에 있는 가스가타이샤(春日大社) 신사의 사자(使者)라고 한다. 가스가타이샤가 창건될 때 가시마신궁(鹿島神宮)의 제신인 다케미카즈치노미코토(武甕槌命)가 이바라키(茨城) 현에서 흰 사슴을 타고 나라에 왔다는 전설이 나라 사슴의 유래로 전해지고 있다. 이 책은 바로 이런 신화적인 부분을 역사와 코미디로 버무린 발칙하고 유쾌한 역사판타지다.

 

암사슴이 입을 우물우물 움직였다. 마치 뭐라고 이야기를 하는 듯하다고 느낀 그 순간, 사슴이 ‘휘이이’ 하고 울었다. 정말로 ‘휘이이’ 하고 우는 것이었다.

(중략)

온몸이 완전히 굳어버린 내게 사슴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자, 간나즈키(10월)이야, 선생. 이제 선생이 나설 때가 왔어.”

 

이 책의 작가는 익히 알고 있었다. ‘모리미 도미히코’와 함께 교토를 대표하는 작가로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 제목을 봤을 때, 분명 ‘나라(奈良)’와 관련된 이야기이리라고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판타지는 짐작하지 못했다. 12간지의 이야기나 오사카, 교토, 나라의 사자(使者)인 동물들, 신과 전설 이야기는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실제로 일본인들에게 친숙한 설화로써, 역사적 사실을 가미해 더욱 짜임새 있는 구조로 소설을 완성했다. 이렇게 수수한 제목에 판타지를 입힐 생각을 한 작가에게 된통 당한 느낌이다. 일본 고유의 신화가 흥미를 부추긴다.

 

이 책의 또 한 가지 매력은 일본의 대문호 나쓰메 소세키의 흔적이 묻어난다는 점이다. 학교에 처음 발령이 난 젊은 선생과 학생들의 마찰, 주인공이 멋대로 붙인 다른 선생들의 별명, 유별나게 올곧은 주인공의 성격 등, 21세기 버전 《도련님》이라고 해도 손색없을 정도다. 그리고 동물들이 냉소적인 어조로 인간을 평가하는 부분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떠올리게 한다. 나쓰메 소세키를 향한 작가의 애정이 엿보인다. 비교해서 읽어보는 즐거움도 있을 것 같다.

 

이튿날 1학년 A반 교실에 들어선 순간 앞 칠판에 이런 글씨가 적혀 있는 것이 보였다.

‘양말 네 켤레에 천 엔.’

“바보 같으니라고.”

모두에게 다 들리도록 중얼거리고 칠판을 지웠다.

이튿날 수업.

‘바보라고 하지 마, 멍텅구리라고 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글이 칠판에 적혀 있었지만 말없이 그걸 지웠다.

 

“정말이지 인간들은 어리석기 짝이 없어. 자기들이 대단한 줄 알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바보가 되어가. 그래서 현실을 회피하는 행동이 스스로의 목을 조르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도무지 깨닫지 못해.(중략)”

 

2008년, 《사슴남자》는 일본에서 드라마로 방영되었다. 당시 인기 스타들이 출연한 드라마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책을 다 읽고 드라마를 봤다. 역시 시각적 효과는 원작의 이해도와 재미를 한층 더 끌어올린다. 소설 속에 나오는 유적지와 나라만이 지니고 있는 특유의 정서가 직접적으로 드러나서 이야기의 발랄함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소설과 드라마를 접해보면 나라의 매력을 아는 사람뿐만 아니라, 모르는 사람이라도 그 고즈넉함에 반할 수밖에 없으리라 확신한다.

 

  

 

“그 ‘휘이이’는 뭐야? 너 가끔 그런 소리를 내잖아.”

“아아, 그건 그냥 인사야.(중략) 우리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알아듣겠지.

(중략) 그런 사람을 마지막으로 만난 지는 이제 삼사 백년쯤 되었지.”

“그, 그 사람 남자지? 혹시 이름이 바쇼 아니었나?”

“이름은 몰라. 어쨌든 입이 험한 남자였어. 인사를 했더니 대뜸 방귀 뀌는 소리 같다고 해서 힘껏 차주었지. 아프다면서 울더군.”

 

휘이이 구슬피 우는 밤 사슴 (びいと啼く尻声悲し夜乃鹿)

바쇼의 시가 내 가슴을 쳤다.

 

일본의 정형시인 하이쿠(俳句)의 대가 바쇼도 등장한다. 하이쿠는 번역의 한계가 있어 특유의 아름다운 감성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운데, 시 한 구절이 소설 내용과 맞물려 신기하리만치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킨다. 이쯤 되니 작가의 상상력에 두손 두발 다 들었다. 이렇듯 독자의 흥미를 유발하는 요소들이 소설 곳곳에 배치되어 있어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어찌 보면 이야기는 단순하고 유치해 보일 수도 있다. 지진이 일어나는 원인과 해결 방법을 미신적인 부분에서 찾으니 말이다. 그러나 자신의 고향을 배경으로 멋진 상상력을 펼쳐낸 작가의 글재주가 놀랍다. 역자 후기에서는, 우리 작가 가운데 누군가 경주나 부여, 공주 같은 곳을 배경으로 이런 근사한 상상력을 발휘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데 나 역시 이런 생각을 했다. 일종의 부러움일지도 모르겠다. 독특한 세계관을 지닌 작가의 역량에 감탄하며, 다음 작품에는 어떤 기발한 상상력을 발휘할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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