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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상 스케치
  • 속죄
  • 이언 매큐언
  • 9,900원 (10%550)
  • 2003-09-05
  • : 9,501

‘사실 또는 상상력에 바탕을 두고 일정한 구조 속에서 배경과 등장인물의 행동, 사상, 심리 따위를 통해 인간의 모습이나 사회상을 산문체의 문학 양식으로 표현하는 사람’ 사전에서 밝히는 “소설가”의 정의다. 새삼 “소설가”의 정의를 되새기는 이유는 이언 매큐언의 작가적 역량에 대한 나의 온전한 경외심 때문이다.

2007년 2월, 이 책이 영화로 개봉했지만 흥행에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영화를 보지 못했는데 대충 줄거리는 알고 있었다. 내용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기대하지 않았다. 얼마나 건방진 생각이었는지, 책을 집고 열 페이지가 채 넘어가지 않았을 무렵 깨달았다. 단지 눈으로 글자를 좇을 뿐이었는데 연필과 색연필로 스케치하듯 아름다운 색감이 선명한 풍경을 그려냈다. 그 감각은 너무나 생경했지만 소설 자체를 음미할 수 있는 충분한 장치가 되었다. 이는 영화로 흥행할 수 없는 이유다.

 

책은 1부, 2부, 3부, 에필로그로 구성된다. 각 장마다 서로 다른 시선과 시간을 구분하여 담아냈다. 1부는 1935년 영국의 한 저택에서 하루 동안 일어나는 일이다. 이야기는 글쓰기를 좋아하는 어린 브리오니가 저녁에 올 손님과 가족들에게 연극을 선보이기 위해 희곡을 쓰고 준비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저택에 머물게 된 사촌 롤라와 쌍둥이 형제가 연극에 참여하지만 연극은 무산된다. 브리오니의 언니인 세실리아와 저택 가정부의 아들 로비 사이에는 묘한 긴장감이 감도는데, 브리오니는 자신의 방 창문을 통해 두 사람을 발견한다. 세실리아가 로비에게 지시받은 듯 옷을 벗고 물속으로 들어간다. 그날 오후, 브리오니는 로비로부터 세실리아에게 편지를 전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몰래 편지를 뜯어보는데, 편지에는 성희롱에 가까운 글이 쓰여 있다. 브리오니는 충격에 휩싸이고 이 사실을 롤라에게 말한다. 뒤늦게 깨달은 로비는 세실리아에게 사과하고, 서재에서 둘은 처음으로 사랑의 감정을 깨닫는다. 그날 밤, 쌍둥이 형제가 갑자기 가출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쌍둥이 형제를 찾으러 모든 사람이 수색하는데, 브리오니는 누군가에게 강간을 당하던 롤라를 발견한다. 유일한 목격자인 브리오니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범인은 로비라고 지명한다. 2부는 감옥에 갔다가 전쟁터로 끌려간 로비의 이야기를 다룬다. 피 냄새가 진동하는 시체 사이를 행군하는 로비는 세실리아만을 생각하며 고난의 날들을 이겨낸다. 3부는 간호사가 된 브리오니의 이야기다. 진실을 알게 되고 지난 날 자신이 저지른 실수가 얼마나 큰 파멸을 일으켰는지 자책하며 참회한다. 

 

1부의 줄거리 요약을 자세히 한 이유는 사건의 발단과 간극의 긴밀함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어린 브리오니가 바라보는 시선으로 사건을 그려내고, 단 하루 동안의 일을 긴 호흡으로 끝까지 이끌어내는 작가의 능력은 놀라울 뿐이다. 계속해서 어긋나는 서로의 시선과 오해는 의식의 흐름에 따라 60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감정에 녹아든다.

1부가 아름다운 동화라면 2부는 전쟁의 대서사시이고 3부는 자전적 에세이 같은 느낌이다. 장르가 다른 세 편의 작품이 연결고리가 되어 하나의 주제로 좁혀지는데, 섬세한 묘사와 빠른 전개 속도는 독자를 단번에 사로잡는다.

 

“이렇게 해서 각자의 입장이, 앞으로 몇 주, 아니 몇 달 동안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드러나고, 개인적으로는 그후로도 오랜 세월을 악몽처럼 쫓아다니며 그들을 괴롭히게 될 각자의 입장이 호숫가에서 대화를 나누는 바로 이 순간에 결정되었다.” (241p)

서로 다른 각자의 입장은 얽히고설켜 운명처럼 다가온다. 그것은 파멸과 절망에서 증오와 참회로 이어진다. 이 소설을 한 단어로 규정짓는다면 나는 ‘단절’이라고 하고 싶다. 대화의 단절, 이해의 단절, 입장의 단절은 오해의 불씨가 되어 서로에게 족쇄를 만들었다. 인간 내면의 오만함, 가족의 해체, 전쟁과 폭력이 이를 증명한다. 

 

이언 매큐언은 이전 작품들에서 근친상간이나 폭력, 강간, 인간내면의 숨은 본능 등 충격적이고 엽기적인 이야기를 주로 다뤘다. 섬세한 표현력과 문장력으로 찬사를 받았지만 자극적인 내용은 여론의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다 1998년, <암스테르담>을 출간하고 영국 문학상인 부커 상을 수상하면서 유명 작가 대열에 합류한다. 그리고 2001년, <속죄>가 출간되자 전 세계 독자들과 비평가들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최고 걸작이라는 극찬이 쏟아졌다.

 

책을 읽고 이렇게 오랫동안 여운이 가시지 않는 기분은 오랜만이다. 영화 한편을 본 것 같지만 영화 그 이상이다. 책을 읽고 나서 영화를 봤는데, 상상했던 풍경과 비슷했지만 시각적 효과의 한계 때문인지 역시나 아쉽다. 원작의 묵직함을 따라잡기에 영상매체는 너무 가볍다. 그리고 나는 자신의 역량을 한껏 발휘한 작가의 한계는 어디까지일지 갑자기 무서워졌다. 혹시 아직 접하지 못했다면 꼭 책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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