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심하게 눈이 먼 사람은 보이는 것을 보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은 위대한 진리예요.”
고대 국가들은 하나의 민족으로 성장할 때마다 필수불가결하게 조직이 형성되었다. 그것은 자연의 섭리였고 혼란을 막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수단이었다. 질서와 규칙이 생기고 평화와 안정이 지속되었지만 동시에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구분이 생기기 시작했다. 지배자는 권력과 폭력을 이용했고 피지배자들은 복종과 저항을 반복하며, 인류의 역사는 만들어졌다. 이것이 역사 속에서만 존재하는 일이라고 치부하겠지만, 현실은 과거와 다를 바 없다. 보이지 않는 독재는 여전히 진행 중이고 전쟁과 폭력, 계급사회의 심화는 우리를 마비시킨다. 이 책은 보이는 것을 외면하는 ‘눈먼’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횡단보도에 줄서있는 차안에서 한 남자는 눈이 멀었다. 어둠이 아닌 빛으로 가득한 백색 실명이었다. 그것은 예고 없이 일어난 일이었고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남자는 누군가에게 부축을 받으며 집으로 향했고 다음날 아내와 함께 진찰을 받는다. 진찰이 끝난 후, 의사는 관련 서적을 뒤적이다가 잠이 드는데 다음날 눈이 멀고 만다. 그리고 조금씩 그 증상은 급속도로 전염되어 간다. 단 한사람, 의사의 아내만 빼고. 정부는 눈먼 사람들을 격리시키면 전염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사람들은 먹고 자고 배출하는 생활에 충실해지고, 세상은 무너져간다. 태초의 시대로 돌아간 듯 거리에는 쓰레기와 시체, 온갖 오물로 쌓여가고 사람들은 절망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의사의 아내는 희생을 결심하고 동료들을 이끌며 화합과 희망을 도모한다.
‘만약 모든 사람이 눈이 먼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소설은 그 의문점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혼돈과 절망이 뒤덮인 상황에서, 작가는 인간의 본성을 솔직하고 신랄하게 표현했다. 지배자와 권력이 윤리적 가치관을 파괴하는 상황은 비단 소설 속에만 존재하는 이야기가 아님을 강조하며 진정한 신뢰와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한 가지 눈여겨 볼 점은, ‘의사의 아내’만 눈이 보이는 설정이 소설의 종교적 특성을 아예 배제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자유가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어떤 특정한 사람들이 어떤 특정한 행위를 할 수 있도록 허락되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하면서 중대한 치명적 오류들이 생겨났다” 톨스토이의 <국가는 폭력이다>에서 나온 말이다. 우리는 그 ‘치명적 오류’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오류들을 바로잡기에는 희생과 고난이 따른다는 점 또한 잘 알기에 우리는 스스로 ‘눈먼 자’들이 되어버렸다. 그 결과,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알고 싶어하지 않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제 우리는 그 무지함을 인식하고 눈을 떠야만 한다. ‘눈뜬 자들의 도시’를 만들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