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몽상 스케치
  •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 모리미 토미히코
  • 10,800원 (10%600)
  • 2008-08-30
  • : 1,624

 

 

 

"일기일회라는 말 알아? 그것이 우연의 스쳐 지나감이 될지, 아니면 운명의 만남이 될지, 모든 것은 자신이 하기에 달렸어. 나와 그녀가 우연히 스쳐 지나갔던 일은 운명의 만남이 되지 못한 채 허망하게 날아갔어. (중략) 그 기회를 잡을 재주도 배짱도 없었기 때문이야!"

 

"진리는 어떤 사물과의 우연한 마주침에 의존한다. 이 마주침은 우리에게 사유하도록 강요하고 참된 것을 찾도록 강요한다."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가 한 말이다. 우리는 살면서 종종 의미심장한 우연의 일치를 경험할 때가 있다. 가령 새로 산 옷을 입고 산뜻하게 외출했는데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과 마주쳤을 때, 여행지에서 몇번이고 같은 사람을 만나게 될 때 처럼. 이 책은 바로 그 '우연'을 가장한 인과의 끈으로 이어진 두 남녀의 이야기이다. 

 

책과 처음 마주할 때 가장 먼저 표지에 눈이 가기 마련이다. 나는 번역서보다 원서를 먼저 접했는데, 짧은 흑발의 여자와 사과 모양 배경, 3층 전차, 마네키네코, 코끼리 엉덩이, 텐구,  힘들게 매달려 있는 불쌍한 남자 등이 그려진 표지를 보고 대체 무슨 내용일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책을 다 읽고 표지를 다시 보니, 개인적으로 번역서의 표지에 한표를 주고 싶다. 순진무구 호기심천국인 아가씨와 그 뒤를 따라다니며 항상 우연을 가장하는 소심한 대학생. 내가 생각한 바로 그 장면이다.

 

이 책은 독특하다 못해 괴상(?)한 점들이 넘쳐난다. 남자와 여자가 주고 받듯 서로의 관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되고, 현실인지 꿈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의 판타지적 요소들이 다분하다. 계절별로 이어지는 엉뚱하지만 유쾌한 사건사고들 속에서 두 사람의 거리는 조금씩, 아주 미미하게, 우연 처럼 가까워지지는데 사실 필연일 수 밖에 없는 상황들을 읽다 보면 어느 새 웃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만다. 

 

저자 '모리미 토미히코'는 거의 모든 소설을 '교토'를 무대로 쓴 덕에 '교토 작가'라고 불린다. 물론 이 책에서도 교토의 향취를 물씬 느낄 수 있다. 고급 요정과 이자카야가 즐비한 본토초 거리, 북쪽에 위치한 영엄한 시모가모 신사, 교토의 모든 젊은이들이 밀집하는 시조가와라마치 거리 등 생생한 배경 묘사는 내가 마치 그곳에 서 있는 느낌을 받게끔 한다.

 

독특한 세계관과 아기자기한 배경, 풋풋하고 설레는 두 사람의 거리, 한장 한장 읽을 때마다 머릿속에서 스쳐가는 장면들…이런 잔상들은 이 소설만이 지닌 재미의 매력 아닐까. 낯선 문체에 당황하지만 이내 피식 새어나오는 웃음을 막을 도리가 없을 것이다. 봄 기운 만연한 좌충우돌 망상폭주 교토 로맨스! 사랑에 빠졌다면, 사랑에 빠지고 싶다면 꼭 한번 읽어보길!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