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노동》 - 가정, 병원, 시설, 임종의 침상 곁에서, 돌봄과 관계와 몸의 이야기
매들린 번팅Madeleine Bunting 지음, 김승진 옮김, 반비, 2022.09
“시장과 자본의 매끈한 환상 너머, 사람과 사랑을 거칠게 살아낼 용기를 주는 책”
나는 ‘치유예술교육가’다.
쉽게 말해, ‘예술치료사’이자 ‘심리치료사’라고 불리는 사회적 역할을 가까스로 해내는 중이다. 남녀노소, 학교부터 복지관. 기회와 때가 주어지면 기꺼이 소명을 다하고자 한다. 이때 주어지는 자부심이란. 썩 괜찮은 것이다. 누군가의 삶에 나의 지혜로 도움과 보탬이 되는 삶. 자기를 실현하고 도취하기에 충분하였다. 적어도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우리 모두는 타인의 돌봄에 의해 형성된 존재다(p. 12).”
그렇다.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누군가의 손길과 돌봄은 끊임없이 나를 지탱하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 이렇게 편하게 앉아 지적 호사를 누릴 수 없다. 하지만 뭔가 아쉽다. 잘 알겠으면서도 왠지. 홀로 험한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은 이 오만함은 어디에서 비롯할까.
“돌봄의 언어가 너무 닳아서 의미가 텅 비어버렸다... (중략) ... 상업적, 소비주의적, 그리고 경영관리적인 새 어휘의 쓰나미에 파묻혔는데, 정작 중요한 돌봄의 본질을 이러한 어휘들이 위협하고 있다(p. 18).”
돌봄 혹은 유사 행위가 ‘서비스service’이자 ‘콘텐츠contents’라는 표준화된 관리 영역으로 외주화되며, 삶 곳곳을 생동하게 하는 돌봄의 향취가 증발해버렸다. 흔히 말하는 신자유주의적 시장자본주의라는 ‘문화적 가정(p. 18)’ 때문이리라. 오직 무한한 성장과 번영만이 세상을 진보케 하는 일이기에, 자유롭고 합리적이고 건강한 개개인은 이상적인 천국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 있다. 이른바 수직 상향욕구. 그러는 사이, 수평으로 혹은 하향으로 버텨지고 있는 현실과 뿌리는 거추장스러운 것이 되어버렸다. 하늘로 올라가기도 정신없는 이때, 주위를 천천히 관망할 여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렇게, 경제 발전, 사회 진보와 직접 연관 없어 보이는 돌봄은 가치는 산술적으로, 경영적으로 평가 절하된다.
“전문직 종사자도 포함해 돌봄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이제 시장 메커니즘을 모방한 시스템에서 일해야 한다. (중략) 효율성과 생산성이라는 시장의 용어는 돌봄 제공에 본질적인 가치들에 종종 적대적이다(pp. 64-65).”
돌봄은, 암묵지이자 고도의 예술 행위의 가까운 ‘프랙티스practice(p. 216)’임에도, ‘돌봄의 많은 부분은 삶을 편안하고 무사하게 유지해주는 일상적인 일들이며, 너무나 쉽게 당연시되고 우리의 시야에서 미끄러져 사라지고(p. 13) 있다. 돌봄은 그저 차분한 봉사의 이미지로 그려서는 안 된다. 실제 내 임상 현장에서만 보아도 예상치 못한 과정들이 허다하며, 정신적, 체력적 소진은 덤이다. 말 그대로, 타인의 삶을 끌어안는 고통이 온몸으로 수반된다. 분에 넘치게도 말이다.
“돌봄은 늘 고통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었다. 돌봄에는 누군가의 삶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을 꿋꿋하게 직면하고 버티면서 슬픔을 함께 나누고 변함없이 곁에 있어주고 신체 및 신체의 배설물로 엉망진창인 물리적 현실을 기꺼이 다루고자 하는 마음이 수반된다(p. 66).”
그렇다. 돌봄은 매끈하고 따듯하고 충만한 것이 아니다. 그야말로 고통의 과정을 함께 하는 도반의 여정이다. 하지만 그에 상응하는 사회적 인정, 경제적 보상은 요원하다. 단순히 시스템의 당연한 측면으로만 소비된다. 돌봄이 제공하는 진정한 인간적 만남, 호혜적 관계, 복잡한 과정, 감정의 순환 등의 가치는 점점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소외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나는, 우리는 이 돌봄의 가치를 제대로 알고 이를 지속할 수 있는가? 돌봄 노동자, 돌봄을 행하는 사람에게 기꺼이 높은 가치와 존경을 토대로, 실질적인 피드백을 해줄 수 있는가. 나는 이 과정에서 어떤 위치에 서 있는가. 이대로 포기할 것인가. 새로운 돌파구를 찾을 것인가. 머릿속이 복잡하다. 나는 과연 어떤 돌봄의 길을 걸어갈 것인가. 책을 다 읽은 뒤 내면 깊숙이서 묵직한 목소리가 올라온다.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의 신호탄이려나. 진실을 외면한 채, 기만의 언어로 나름 방어해온 성벽이 무너진다. 와르르. 처참히.
심리치료(예술치료), 상담, 코칭, 교육과 같이 사람을 살리는 일(흔히 활인(活人)업이라 하는)을 하다고 으스대는 나에게, 이 책은 해당 업의 의미와 동기, 아니 나의 존재 자체의 내러티브를 재구성하고 해체하기를 차분하고 담담하게 요청하고 있다. 그것도 아주 구체적인 현장의 언어로. 아니 현장을 고스란히 옮겨낸 몸과 살의 온도로. ‘달콤한 고통’이며, ‘사랑스런 충고’다. 아프지만 감동적이고, 희망적이지만 매섭다.
소위 ‘유명하고 성공적인 위치에 있는’ 전문가가 되기 싫다며 대안적인 공간을 마련하였고 새로운 포부를 담아 창직을 시도했다. 그렇다면 이제, ‘사랑의 노동으로 돌봄을 실천하는’ 전문가라 자신 있게 외치면 될까. 아니. 뼛속 깊이, 아니 눈에 뵈지도 않는 DNA 구조까지 휘감아 침윤한 ‘성공과 성장’에 대한 갈망은 진정한 돌봄과 사랑의 길에 안개를 드리웠다. 결국, 타인에게로 가던 길을 돌아 나에게로 돌아선다. 그래도 다행이다. 아직 나에게도 비겁하게 달려가진 않았다. 다시 용기 내어 타인에게 향하는 길로 몸을 틀어본다. 희망도 있기에.
“줄레타는 측은지심은 인간 본연의 역량일지 몰라도 손상되기 쉽다며, 산업화되고 시장회된 의료에서는 측정 가능한 결과가 나오는 거래적 돌봄에 우선순위를 두게되므로 긍휼이 밀려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줄레타는 희망적인 면도 이야기했는데, 긍휼은 본질적으로 호혜적이고 알아차리기 쉽다. 또한 전염성이 있어서 한번 경험하면 다른 이에게도 발휘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p. 211).”
가자. 돌봄을 전염시키러.
*이 서평은 출판사 ‘반비’로부터 도서 지원을 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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