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편집자에 대해 가볍게 스쳐보려고 구매하였는데, 주의깊게 읽어나간 책이 되었다. 책 내용이 편집자의 생활과 이에 얽힌 이야기라는 수필류의 글에서 멈추지 않고, 저자가 일을 해가며 만난 작가들과 읽은 책들에 대한 지도로 채워져서 이를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저자의 책 지도에 나의 조그만 지도가 겹치는 교차로를 발견할 때는 혼자 즐거워도 했고. 책을 읽어나가며 몸은 점점 더 앞으로 구부려져 갔다. 그렇게하면 편집자가 오랜시간 스며들도록 열어두어 받아들인(p36) 작가들의 지식과 삶의 영향이 1차 필터되어 독자인 나에게 좀 더 잘 전달될까 해서일까? 역시 독서의 좋은 점은 작가가 오랜시간 동안에 걸쳐서 얻은 경험을 짧은 시간에 값싸게 도둑질하는 것이다.
저자는 책을 중심으로 자신의 바라봄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화되어가는 것들을 이야기한다. 한 때 막역한 사이였던 작가들과의 관계 변화, 나이들어가는 주위의 편집자들과 그들의 사라져감을 바라보는 아스라함, 한 명의 독자로서 자신이 읽어왔던 책들의 변화 궤도. 이러한 변화들은 아쉬움들 투성이지만, 그래도 저자는 변화들을 다분히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다음과 같은 좋은 인용구와 함께. [완벽한 세계를 향한 절대주의적 분노보다는 유머와 유연함을 가지고 부조리하면서 추악한 인간 존재의 운명을 파악, 수용해야 한다 (p35)}. 학자가 아니라 출판시장의 어엿한 직장인으로서 단련된 모습이다. 그래도 저자에게 변하지 않는 건, 책에 대한 신념이다.
젊은 시절 이문열과 박완서를 읽지 못했던 걸 후회하는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독서의 유용성이란 현실적인 필요에 따라 읽기보다 오히려 자기 취향과 욕구를 억누르고 작가의 대표작으로 직진해서 들어갈 때 더 크게 발휘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p179)]
그리고 전성기 시절 명성을 얻은 작가가 노년이 되어가며 바람직하지 않게 무너질 때, 과연 그 작가의 책을 읽어야하는가라는 질문을 하며, [작가의 삶과 사유가 절정에 달했을 때 작품을 놓치지 않는게 나아 보인다 (p180)]라는 의견을 낸다. 같은 생각이다. 물이 드넓은 바다로 흘러들어가 큰 파도로 일렁이며 거대한 하얀 포말을 일으킨 다음, 멋진 빠리의 센 강으로 흘러내려 가기도 하지만, 어떤 물은 때로는 도시 외곽에 있는 시궁창의 구정물로 떠내려 가 더럽게 고이기도 한다. 마지막은 더 이상 그 전과 같은 순수한 H2O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한들 한 때 전성기 시절 그 물의 거대한 파도와 일렁거림을 어찌 아름답지 않았다고 하겠는가? 위대한 가수 심수봉의 노래 '그 때 그 사람'은 한 명이면 족해도,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때 그 시절의 책'은 아무래도 여러 개 일수록 좋다.
직업인으로서 자신이 편집한 책에 대해 보다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보도자료를 쓰지 못한 적도 있었다는 것을 고백하며, 다른 이들이 종종 하듯이 자신도 작가의 글에 대해 뭉툭한 색연필 대신 날카로운 펜으로 쓰기를 바라기도 한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너무나도 유명한 과거의 작가들에 대해 과대평가 된 것 아니냐고 솔직히 이야기를 한 이들의 인용구를 적어 준다. 그 중 셰익스피어, 혜밍웨이를 예시로 든 니컬슨 베이커와 도나 다트가 나오길래, 나는 두 명을 인터넷에서 검색한 후 그들의 컴퓨터 화면 위 얼굴을 매섭게 째려보았다. 왜냐하면 최근 셰익스피어의 멋진 문구들을 보며 키득거렸고 헤밍웨이의 <태양은 다시 뜬다>를 근사하게 읽었으니까 ㅎ ㅎ. 아담 스미스의 <도덕 감정론>은 2차 저작물만 읽다가 아무래도 본서를 읽어야할 것 같아 최근에 구입했지만 아직 안 읽어봐서 탕누어도 화면에서 째려볼지 아니면 머리를 끄덕일지는 책을 읽은 후 결정해야겠다.
작가는 이 책에서 저자-편집자-독자의 1인3역에 더하여 글항아리 출판사의 마케터 역할도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 책에서 저자의 독서지도를 보다가 프리모 레비 외 몇권의 책들을 구매하게 되었는데, 그 중 4권이 글항아리에서 출판한 책이었으니까.
<쇼와 육군>, <마르케스의 서재에서>, <네 번째 원고>, <강진 백운동 별서정원> 이렇게.
(<읽는 직업>의 표지사진을 찍은 김춘호 작가는 회사 업무로 몇번 만난 적이 있었는데, <강진...>의 책 사진도 찍었길래 겸사겸사 구입했다.>.
이로써 기존에 가지고 있는 3권과 함께 글항아리 책은 총 7권이 되었다. 그 중 절반은 양장판인 두꺼운 책들이고 호킹지수는 아직 30%에 미치지 못한다.
글 내용은 좋으나 편집자로서 출판결정을 하지 않는경우가 많다고 한다. [왜일까. 1000명 이상의 독자를 확보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p27)]. 내가 산 이 책을 보니 2020년 9월 25일에 1쇄 후 같은 해 10월 5일에 인쇄한 2쇄이니, <읽는 직업>은 1000명 이상의 독자는 무난히 달성한 것으로 보인다. 축하드린다! 책의 마지막을 '책, 얼마나 사고 얼마나 읽어야 할까'라는 글로 맺었는데, 거기서 드디어 나와 저자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한달에 30만원 정도를 책 구입에 쓰고, 그 중 반의반의 반도 안 읽은 것. 걸어온 길보다 앞으로 가야할 길이 더 많다.
좋은 글솜씨로 쓰여진 책이라, 문장 하나하나를 천천히 읽으며 시간이 지나갔다. 질서, 밀도, 짜임새, 연결되는 상상력. 문장을 읽어나가며 문득 이러한 추측이 들었다. 이은혜 작가는 혹시 한나 아렌트와 같은 글쓰기를 하고 싶은 걸까? 이 책을 꼼꼼이 읽어 보시라. 추측에는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