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폰트를 사용하는 모두에게, 그리고 특히 무심코 써왔던 윤고딕을 더 잘 알고싶은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
한국 대표 서체 디자인 회사, 윤디자인그룹이 30년간 다방면으로 시도해 온 과정이 오롯이 담겨 있다.
이 책은 윤디자인그룹이 30주년을 맞이하여 윤디자인그룹이 생각하는 가치와 지향점을 보여주기 위해 시작되었다. 그동안 진행한 일에 대한 소개 뿐 아니라, 독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기록을 고민했다고 한다.
책의 키워드는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한글’ ‘디자인’ ‘품’ ‘격’으로, 먼저 ‘한글-독창성과 역사적 가치’에서는
한글에 대한 이해의 필요성과, 대중의 심미안을 높여야 함을 강조한다. 윤디자인그룹의 대표적인 서체인 대한민국독립만세 그리고 윤명조·윤고딕과 서체 개발의 역사, 지역 서체와 캘리그래피 서체, 전통 복원 폰트를 다룬다.
다음으로 ‘디자인-아이디어와 트렌드’에서는 미디어 환경 변화를 연구하고 기존 서체를 끊임없이 대중문화로 이끌어가는 기업이 되고자 했던 시도를 소개한다. 다양한 스타일을 시도했던 서체들과 한글 폰트 대중화를 이끈 ‘스타폰트’, 게임이라는 소셜 플랫폼을 위한 폰트를 다룬다.
‘품-사명감과 공동체’에서는 ‘모두를 위한 디자인’이라는 사명감을 가지고 해마다 진행하는 ‘희망한글나무’ 프로젝트와, <정글>에서부터 <타이포그래피 서울>까지 여러 미디어를 운영해온 과정을 다룬다.
마지막으로 ‘격-확장과 비전’에서는 미디어 발달에 맞춰 새로운 타이포브랜딩을 만들어 나가는 시도인 전용서체와, 엉뚱상상이라는 사업부에서 글자의 영역을 확장하는 시도를 소개한다.
브랜딩 회사의 디자이너로서 읽은 이 책은 서체 회사의 간접 체험을 하는 듯한 상세한 기록이었다. 한글 서체 디자인이 어렵고 힘들다는 것은 조금의 경험으로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각 프로젝트의 구체적인 과정을 보니 윤디자인그룹 구성원들의 장인정신이 정말 대단하게 느껴졌다. 또 영문 서체를 더 많이 쓰고 익숙한 편이고, 한글 서체는 항상 언젠가 공부해야겠다 생각하고 있는 분야였는데 마침 한글날에 맞춰 이 책을 읽은 것이 뿌듯하다. 1443년 창제 연도로 보면 한글의 역사에서는 짧아 보이면서도, 디자인 회사의 연혁으로는 길다고 할 수 있는 30년이라는 세월 속 윤디자인그룹의 다양한 시도를 통한 한글 서체의 변화가 함축되어 담겨있어서, 한글 디자인의 대략적인 흐름을 짚은 기분이 들었다.
(29p)
윤디자인그룹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윤명조·윤고딕은 1991년 구상 및 제작을 시작하고 1993년 1차본 완성되었으며,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300대가 1997년에 완성되었다. 2020년에도 윤고딕 매거진 700가 완성되었으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발전시킬 계획이라고 한다.
(57p)
내가 서체에 대해 처음 관심을 가졌던 것은 초등학생때 컴퓨터를 처음으로 다루며 캘리그라피 서체들을 골라쓰게 되었을 때여서, ‘캘리그래피에 대한 기존의 관점 변화’를 잘 보여주는 폰트로 ‘봄날’을 소개한 내용도 흥미로웠다. 지금의 다양한 한글 서체를 만나게 되기까지 참 빠른 변화들이 있었다.
2001년의 ‘필 서체 2.0’ 상품 홍보 문구 : ‘붓의 질감과 터치의 자연스러운 느낌을 지니고 있으며, 정돈되고 안정적인 공간 구성이 현대적인 스타일에도 잘 어울리는 고품격 서체 모음.’
2007년의 ‘봄날’ 홍보문구 : ‘캘리그라퍼 강병인의 손글씨를 바탕으로 제작되어 봄날의 활력과 생동감을 느낄 수 있는 필력이 살아 있는 서체.’
(69p)
석보상절에 대한 언급이 나오니, 뜬금없지만 올해에야 보았던 <뿌리 깊은 나무>도 떠올랐다.
(72p)
책에 소개된 프로젝트들 중에서 내가 참여한다고 생각해보면 전통 복원 폰트 작업 과정이 재밌을 것 같아 보였다. 이런 개성있는 한글 폰트들을 실제로 사용해 본 적은 드물지만, 어떻게 사용해보면 좋을지도 궁금하다.
72p
고암 정병례 선생의 전각 작품은 ‘새김아트’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며 전각의 모던한 아름다움을 전하고 있어 눈길을 끌었다. 돌이나 나무 등의 재료 위에 쓰고 새겨 찍어내는 전각은, 다루는 재료의 물성과 칼맛이 느껴져 질감 있는 서체로 만들 수 있기에, 확실히 손글씨와는 차별화를 이룰 수 있을 거라 판단했다.
(134p)
서울서체 프로젝트의 진행 과정을 상세히 알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세 가지 후보안이었던 ‘단아’, ‘열린 마음’, ‘어울림’ 중에서 서로 어울려 살아가는 마음을 담은 서체 ‘열린 마음’이 채택되어 추후 ‘서울 한강체’와 ‘서울 남산체’로 발전한다. ‘단아’와 ‘어울림’으로 선정되었다면 서울의 얼굴은 지금과는 다른 표정이었겠지?
142p
희망한글나무는 윤디자인그룹이 매년 한글날을 즈음해 진행하는 기부 캠페인으로 2009년 제1회를 시작으로 10년 념게 이어오고 있다. 매 회마다 특정한 한글 폰트 1종 이상을 ‘희망한글나무 서체’로 지정하고, 그것을 참여자들이 구입하면 모금액 전액을 소외계층 이웃과 복지단체 등으로 전달한다.
150p
(2015년 한글날 기념 행사 ‘한글문화큰잔치’에 참여하여 시민들에게 희망한글나무와 한글 나눔 문화에 대해 설명했다는 내용 중에서) 당시 시민 한 분의 반응이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그분은 ‘한글을 디자인한다’라는 개념 자체가 너무나 생소하다고 했다. 한글의 자소 및 자모음은 이미 세종대왕 시기에 ‘디자인이 완료된 것’ 아니냐는 말도 덧붙였고. 사실, 곰곰 들어보면 틀린 말도 아니다. 현장에 나가 있던 직원 한 명이 그분을 위해 특별히(?) 시각 디자인 영역에서 ‘서체’가 갖는 중요성, 서체 디자이너들이 하는 일 등등을 굉장히 상세히 알려드렸다고 한다. 그랬더니 그분 반응이, “젓가락 만드는 일 같은 거네요?”라고 하더라는 거다. 이유인즉, 젓가락은 이미 그 원형(작대기 두 개)이 ‘디자인 완료된’ 상태이지만, 무수히 다양한 디자인이 나오기 때문이란다. 그렇다고 디자인만 바뀌는 게 아니라 식기 도구로서의 기본적인 사용성도 유지되고 있으니, 여러 면에서 한글 서체 디자인과 비슷하다는 취지의 말이었다. 이 얘기를 전해 듣고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더랬다. 참으로 절묘하고도 오묘한 비유랄까.
>통찰력이 뛰어난 일반인의 발언에서 유지원 타이포그래피 전문가가 <글자 풍경>에서 언급한 숟가락 비유가 떠올랐다.
<글자 풍경> 중에서
디자이너 아드리안 프루티거는 본문용 기능적인 폰트를 점심에 쓴 숟가락에 비유했다. 숟가락의 생김새가 기억난다면 뭔가 불편했다는 뜻이니, 기억나지 않아야 기능을 잘 한 것이다. ~ 도쿄의 한 오므라이스 전문 음식점에서였다. 그곳에서 묵직한 무게감을 지닌 날렵하고 아름다운 숟가락을 만났다. 오므라이스가 한 입 크기로 깨끗이 떠졌고, 접시에서 입에 이르는 짧은 여행 동안 손과 눈과 입을 모두 즐겁게 해 주는 숟가락이었다. 그 숟가락만은 두고두고 기억이 난다. 훌륭한 한글 폰트 디자이너들이 최근에 만들어내는 인상적인 본문용 한글과 로마자 폰트들을 보면, 이 숟가락이 떠오르기도 한다. 때로운 숟가락도 기억에 남을 수 있다.
+ 이건 또 다른 얘기지만, 월간디자인 전은경 편집장님이 진행하는 트레바리 <물욕없는 디자인> 모임에서 월간디자인 501호의 주제인 Eating Experience를 이야기한 경험도 겹쳐진다. 미각을 자극하는 새로운 커틀러리 디자인의 필요성에 대한 내용이었다. 최근엔 다양한 폰트가 개성을 뽐내는데, 이제 반대로 폰트가 커틀러리에 영감을 줄 차례일까.
166p
‘미디어는 기록이다’라고 정의하고 싶다. 그리고 그 기록은 반드시 진정성을 내포하고 있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윤디자인그룹이 미디어를 운영하는 이유 역시 ‘기록’ 때문이다. 윤디자인그룹을 운영하면서 늘 중요하다고 판단해온 한글과 타입, 그리고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기록. 하지만, 개인 소유물이 아닌 공공을 위한 정보 공유의 목적으로, 게다가 수익 창출도 전혀 되지 않는 이 전문 분야을 공공기관이나 교육기관도 아닌 작은 기업에서 꾸준하게 운영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윤디자인그룹은 미디어 전문 회사도 아니다. 그럼에도 윤디자인그룹이 <정글>을 필두로 <타이포그래피 서울>까지 여전히 미디어를 운영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한글 타입과 타이포그래피 분야의 과거와 현재의 기록, 그리고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미디어를 운영함으로써 역사적으로도 교육적으로 가치가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기록들은 곧 대한민국의 자존심으로 남게 될 것이라 믿고 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이러한 의지를 알아봐준 수많은 독자들이 계속해서 윤디자인그룹의 미디어를 ‘열독’해주고 있다.
>한글 서체 개발 뿐만 아니라, 미디어 운영에서도 윤디자인그룹의 한글에 대한 큰 애정이 느껴진다.
224p
나는 이렇게도 말한다. 기업은 얼굴이고, 브랜드는 기업의 표정이며, 브랜딩은 기업의 얼굴에 표정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따라서 브랜드/브랜딩에 대한 내 고민은 ‘무엇으로 어떤 표정을 짓게 할 것인가’에서부터 출발한다. ‘무엇’에 해당하는 것이 내게는 타이포그래피다. 이 지론에 근거하여 내가 수 년째 핵심 사업으로 추진 중인 것이 바로 ‘타이포브랜딩’이다.
254p
서체 디자이너들에게 ‘글자를 갖고 논다’라는 개념은 퍽 낯설었던 듯하다. 하기야 획 하나를 디자인하고 다듬는 데만 수 시간을 들이는 전문가들이니 그럴 만도 하다. 그들에게 글자는 ‘갖고 노는’ 대상이기보다 ‘시간을 들여 오랫동안 손봐야 하는’ 대상에 더 가까울 것이다.
255p
한쪽에선 더없이 기품 있는 시계를 만든다. 이른바 크래프트맨십이다. 기능적으로 우수한 시계를 ‘대중화’한다. 다른 쪽에선 시계를 갖고 논다. 시계라는 오브제를 가지고 최대치의 변주를 보여준다. 한쪽의 시계는 시간을 엄격하고도 정확히 알려준다. 다른 쪽의 시계는 시간이 중요치 않다. ~ 시간이 궁금해서가 아니다, 시계가 흥미로워서 사람들이 모인다. 즉 이 시계는 대중을 끌어모은다. 그렇게 서서히 ‘대중문화’가 생겨난다.
258p
글자를 글자로만 바라보는 시각에서 벗어날 때, 즉 글자를 이미지로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
글자 디자인이 가 닿을 수 있는 영역을 확장된다.
>‘폰트로 외계인과 소통하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클라이언트에게 제안할 정도로, 말그대로 엉뚱하게 상상하며 글자의 영역을 확장하려는 시도가 엿보였다.
*TS파트너즈 활동의 일환으로 윤디자인그룹으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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