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의 도시
까리 2025/11/10 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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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의 도시
- 연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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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0) - 2025-09-25
: 785
책 한 권을 읽고 작가의 이름이 마음에 새겨지게 되는 일이 종종 있다. [부적격자의 차트]의 연여름 작가 역시 그랬다. 가상의 세계를 이야기하면서도 어쩐지 낯설지 않은, 담담하면서도 아련한 느낌을 주는 문체에 쏙 빠졌었던 것 같다. 기대감으로 이번 책을 들었다. 지난번 보다 훨씬 더 광활하면서도 체계적인 배경과 탄탄한 구성에 초반부터 몰입하여 읽기 시작했다.
먼 훗 날, 극심한 토양 오염이 휘몰아친 후 뿔이 자라는 인간이 생기기 시작했다. 뿔은 타인에게 어떠한 피해도 없고, 전염성도 없음이 확인된 후 그렇게 각인(角人)과 비각인이 함께 사는 세상이 도래한다.
각인은 뿔이 자랄 때 극심한 통증을 겪게 되고 야생 사망에서 자라는 흑각을 섭취하면 그나마 통증을 줄일 수 있다. 각인에게 흑각은 필수품이 되지만 공중도시 라뎀에서는 흑각의 불법 채취를 금지하며 공중도시의 흑각만을 유통하려 한다. 태어날 때부터 지상 그늘에서 자라온 '시진'은 비각인으로 면역인이지만, 각인인 누나 '유진'의 고통을 보며 자라왔기에 누나를 위해 그늘에서 야생 흑각을 불법으로 채취하며 근근히 살아간다. 각인과 비각인의 차이를 좁히지 못한 채 누나 유진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 지도 7년. 절친했던 친구 '베르트' 마저 각인 혐오자에게 살해당한 소식을 들은 시진은 베르트의 행적을 뒤쫓게 된다.
차별과 혐오, 계급이 나뉜 사회에서도 끝끝내 지켜야만 하는 가치에 대해 되새겨 보는 시간이었다. 소설의 배경은 가상 현실, 혹은 도래하지 않은 먼 미래 이야기지만 연여름의 글이 낯설지 않은 건 언제나 '인간' 자체를 들여다 보기 때문 아닐까.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지 못하는 세상이라면 그 어떤 세계든 멸절되고 말 것이다. 연여름 작가의 이야기 속 주인공은 어쨌든 지켜낼 세상에 대한 의지가 있고 변화에 앞서 타인을 먼저 떠올릴 줄 아는 인물들이라는 점에서 마음이 따뜻해진다. 메마른 내 상상력과, 상실을 거듭하는 내 인류애에 다정한 온기 한 방울 머금게 되는 글이랄까.
불공정하고 불합리한 세계를 벗어나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새 삶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눈앞에 두고도 선뜻 나서지 못하는 시진의 마음을 나는 알 것도 같았다. 어쩌면 누군가는 바보 같은 짓이고, 후회할 짓이며, 생산성이나 실용성이 전혀 없는 선택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그 멈칫하는 마음에 깃든 이타심을 본다. 세상이 실용만으로 돌아갈 리가 있나. 그 바깥의 온기에 집중하고 싶다. 이 이야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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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샐은 늘 누군가의 사정이나 이야기에 먼저 귀를 기울였다. 처음엔 그저 잘 들어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경청이라는 외피를 두른 능동적 침묵이었다는 것을 시진도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알 수 있었다.
🔖74. 너는 나를 이해하는 게 아니야. 연민하는 거지.
🔖115. 데인이 그토록 열정적으로 뿔을 연구한 이유는 다름 아닌 각인의 정체성을 더욱 깨끗이 부정하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이 모순적이긴 했다. 두 번 다시 지상에 발 들이지 않고, 이 뿔을 그 어떤 타인에게도 드러내지 않으며, 그야말로 투명하게 천국의 천사로 지내려는 계획을 위해서였으니까.
🔖148. 하지만 그렇게 하나둘 자기를 숨기는 일이 결국, 다른 각인들의 삶을 지우는 출발점이 되기도 해.
🔖196. 원래 한번 비어버린 자리는, 지키는 사람이 없으면 금방 허물어지고 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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