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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리님의 서재
  • 너의 유토피아
  • 정보라
  • 15,750원 (10%870)
  • 2025-01-15
  • : 43,250
소설을 읽는 동안 왜인지 마음이 불편했다. 어딘가 꽉 막힌 듯한 좌불안석 느낌. 그럼에도 멈출 수가 없었다. 불편하지만 알아야 할, 기억해야 할 이야기들이 가득 담겨 있기 때문이다. 가볍게 한 편 읽어 보겠다고 책을 들었다가 한 자리에서 끝까지 읽었다. 표제작인 '너의 유토피아'와 다른 듯 비슷한 결의 7편, 총 8편의 sf 단편 소설이다.

유토피아를 '세상에 진짜로 변화를 가져오는 움직임'이라고 표현한 사회학자가 있다고 한다. 세상은 계속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지만 옳은 방향의 나아감인지 아리송한 순간들이 늘 있다. 재난, 전쟁, 혐오와 차별 속에서 주어진 환경에 대한 자각 없이는 어쩌면 평온한 삶을 살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정보라 작가의 단편들을 읽고 나서는 어쩐지 불편하고 괴롭고 막막하더라도 나서서 깨닫고, 깊이 애도하고 연대하며 미약하나마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애써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8편 이야기 중에 제일 읽기 힘들었으면서도 뇌리에 박힌 작품은 '여행의 끝'. 식육을 하게 되는 바이러스가 순식간에 전파되어 전염이 되지 않은 확실한 생존자들을 우주로 보내 지구를 구할 방법을 찾아 오는 임무를 맡은 주인공과 동료들. 우주선 내에도 감염자가 발생하면서 최대의 위기를 맡게 된다. 적나라한 글에 여러 번 괴로웠으니 나에겐 굉장히 하드한 SF였다. 결말을 살짝 예상하긴 했지만 적잖이 놀랐고 그래서인지 강한 인상을 줬던 이야기였다.

'one more kiss, dear'도 참 좋았다. 개인과 거주지, 아파트와 건물 전체가 동기화 되는 가상의 미래. 왠지 터무니없는 소재는 아닌 것도 같다. 사물인터넷의 확장으로 개인의 행동과 취향 등 거의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는 세상에서 주인공이 거주하는 아파트 건물 내의 엘리베이터가 화자가 되어 이야기를 끌어간다. 엘리베이터의 시선으로 보여지는 한 사람의 일상과 숨은 의미들을 함께 쫓다 보면 왠지 삭막하지만 온기 있는 풍경이 느껴진다.

제일 처음 수록된 '영생불사연구소'는 키득거리며 재미있게 읽다가 뒷통수 한 대 맞는 기분을 선사하며 낯설지 않게 책의 문을 열었다는 생각이 든다. 'maria, gratia plena'는 영화 한 편을 시청하는 듯한 몰입감을 줬고 식물인간 상태로 누워 있는 사람의 뇌파를 이용해 그 사람의 경험 혹은 꿈을 생생히 들여다볼 수 있는 설정이 기발하게 느껴졌다. 표제작 '너의 유토피아'는 지옥 같은 상황에 떨어져 있어도 조금이나마 계속 나아가겠다는 의지와 희망이 제일 많이 드러났던(이 소설 중에서) 작품이었다.

불편해도 인식해야 하는 것. 그리고 계속 나아가고 이야기하는 것에 대한 마음을 작게나마 품는다. 어두운 현실이지만 언젠가 만나게 될 유토피아는 결국 모두가 힘을 합쳐 꾸준히 만들어가야 하는 세상이니까. 작은 변화의 움직임이 거대한 물결이 될 때까지 우리는 계속 움직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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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그렇게 나와 녀석은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우주선 구석에 나란히 앉아서 서로 알아듣지 못할 말을 늘어 놓으면서도 또 그 알아듣지 못할 바를 무조건적으로, 무비판적으로 들어주었다. 사실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법이다.

🔖108. 대화란 것이 성립되지 않는다. '협상'이니 '의견 조율' 따위 듣기 좋은 말로 포장하더라도 결국 끝에 가서는 어느 한쪽이 이기고 다른 쪽이 굴복하는 형태가 될 수밖에 없다. 의견이 대립되는 상황에서 관련자 모두가 100퍼센트 만족할 수 있는 해결책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관련 당사자들이 모두 상대를 위해 '양보'한다 하더라도 결국은 더 많이 양보하고 더 많이 참아야 하는 사람이 언제나 있게 마련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타협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대화는 결국 전쟁이고, 그 결과는 언제나 어느 한쪽에게 강압적이고 때론 폭력적이다.

🔖120. 희망은 그러니까, 있다고 생각하면 있는 거야.

🔖160. 희망은 있다고 생각하면 있고, 의미는 만들어서 부여하면 생기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주관적인 믿음이다. 객관적인 상황이 그런 주관적인 믿음을 뒷받침해준다는 보장은 없다. 우주 삼라만상이 나 한 사람의 뜻에 일일이 따라주어야만 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정보라 #너의유토피아 #래빗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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