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식 존엄사"라는 제목에 끌렸다. 그중에서도 존엄사 앞에 "단식"이라는 단어가.
이 책은 의사로써 저자가 자신의 어머니의 죽음을 지켜본 과정과 결국 인간 으로써의 존엄을 지키며 죽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게 한다.
개인적으로는 조 부모님과 이별하던 과정이 떠올랐다. 오로지 산 자의 입장으로만 서있었던 내가.
저자의 집안은 소뇌실조증의 유전자가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어머니 쪽이. 그 질환은 치료 약이 없고, 뇌가 기능을 잃어가며 운동 감각이 떨어지는 것을 시작으로 나중에는 음식, 호흡까지 점차적으로 전체의 운동 기능이 떨어져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어머니는 60세에 발병하셨으나, 어머니의 남동생은 이른 나이에 발병했고, 그 자식들에게 까지 이어져 온 가족이 소뇌실조증으로 사망하였다. 그 과정 중에서 자살한 이도 있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자신의 병에 대해 정확히 알고 계셨고, 오랜 기간 요가를 해오셨기에 병의 진행을 더디게 할 수 있었으나, 결국 타인의 도움이 절대적인 상태가 이르렀을 때 스스로 점차적으로 곡기를 끊으시며 돌아가시길 원했고, 충분히 자식들과의 의논을 통해 말 그대로 존엄사를 진행하셨고, 편안한 상태에서 돌아가셨다.
이 책은 그 어머니와 아버지의 이야기를 비롯하여, 어머니가 그런 결심을 하시게 되는 과정이다.
이 책은 죽음의 관점을 가족의 입장인지, 환자 본인의 입장인지를 생각케 한다. 가족의 입장이라면 오래토록 그가 살아 계시길 원하겠지만, 당사자라면 과연 그럴까...? 그래서 나는 나의 할아버지가 생각 났다. 오랜 기간 병원에 계시다 가신 할아버지. 우리 가족은 모두 할아버지를 오래토록 살아계시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정말 최선이 였을까. 물론 그런 노력을 하지 않았다면 또 다른 후회를 하고 있겠지.
할아버지는 무엇을 원하셨을까. 모르겠다. 어머니와 할머니의 마지막을 자주 떠올린다. 말기암으로 돌아가셨지만, 나는 늘 할머니가 더 오래사셨어야 한다는 말을 한다. 하지만 할머니의 주변 분들은 오래 아프지 않고 편히 잘 갔다는 말씀을 하실때마다 드는 서운함은..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결국 내 욕심인가 싶었다. 나의 마지막이라면 나도 저자의 어머니와 같은 선택을 할 것이고, 어쩌면 내 나라에서 그런 죽음을 허용하지 않고, 나의 가족이 반대를 한다면 나도 스위스로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했으니까.
나의 마지막에서 나의 죽음을 내가 선택하는 것. (건강할 때의 자살이 아니다.) 악용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지만, 무조건 그 케이스만을 들어 '그것은 옳지않아'라고 말할 수 있을까.
책을 읽으며 다시 한번 사회적으로 "존엄사"라는 것을 심도 깊게 논의했으면 한다. 종교적 이유로, 사회 통념상의 이유로 무조건 '아니다'라고 하기엔 우리의 마지막을 어떻게 맞이하는가도 인간으로써 존엄을 지키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 그것은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의 '질'과도 관계가 있다. 연명 장치에서 가족과의 이별을 준비할 시간마저 없는 마지막은 과연 가족과 본인에게 좋은 것일까?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에게 죽음이라는 단어가 너무나 부정적이기에 섣불리 꺼내기 힘들다는 사실이 가장 비중을 차지하는 것 같다.. 죽음에 대해 가족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 자체가 어려운.. 현실.
여전히 내 가족, 내 지인의 죽음은 슬프고 힘들다... 남은 시간이 얼마든 간에..
반대로 나의 죽음이라면...나는 무조건 적인 연명을 바라지 않는다.
이 양가적인 감정. 어떻게 해야 할까.
"강제 인공 영양 법은 최선을 다해 반드시 환자를 살리려는 의료 인의 사명감과 환자를 굶겨 죽게 내버려둘 수 없다는 가족의 죄책감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이런 관념 이면에 '사망'을 직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숨기고 있다." p.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