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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ddus님의 서재
  • 잘못된 단어
  • 르네 피스터
  • 15,300원 (10%850)
  • 2024-03-20
  • : 4,410

"정치적 올바름은 어떻게 우리를 침묵시키는가"라는 부제가 달린 책이다. 무슨 말일까. 궁금했다. 선거가 다가오는 철일 수록 나는 정치인들의 말이 더 궁금해진다.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그들이 내뱉는 수많은 말들, 그 말 중 취사선택되어 언론을 통해 재 편집되어 또 전해지는 그 수많은 말들이.

이 책은 독일인인 저자가 현재의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해 말하고 있다. 절대 선을 추구하는 말들, 그로 인해 입을 닫은 시민들, 그에 반발하여 쏟아지는 각종 헤이트스피치에 열광하는 시민들. 이 책은 미국의 정치를 통해 왜 민주당의 위기가 왔으며, 극우가 득세하는 지를 "언어"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사실 번역의 이슈인지, 주제 자체의 어려움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게는 조금 어려웠다. 중첩된 부정어들이 등장해서 였을까.ㅠ 
하지만 나의 이해도와는 별개로 갈수록 화합이 되어가는 사회가 아니라 양극단으로 쪼개지는 사회를 봐야 하는 것인지, 우리가 갖혀있는 사고는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본질을 흐리는 언어의 사용까지.

과거의 미국은 인종차별에 대한 주제를 놓고 말한다면, 다양한 의견을 주고 받는 토론이 가능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의 인종차별은 말그대로 차별받는 대상이 하는 말 이외에는 의미가 없고, 그 대상이 아닌 이들(예를들면 백인) 말하는 인종차별관련 의견에는 위선이라는 날선 반응이 앞선다고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 'N워드' 그 단어를 그대로 지칭하는 것이 상대에 대한 모욕이기에 대체 수단으로 쓰는 저 단어조차 함부로 내뱉을 수가 없는 분위기인 것. 특정 주제 대하여 단어 사용의 '허용한계선'이 너무나 빠르게 바뀌고, 범위가 넓어지면서, 선의를 가진 사람 조차 그 한계선을 자기도 모르게 넘어서는 순간 인종차별주의가가 되어버리는 형국이다. 그렇다면 인종차별을 해결하기 위한 토의나 토론이 가능해지겠는가? 누구도 그 말을 꺼내지 못하는 사회가 되어버린 셈이다. 내가 쓰는 말이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질지 아무도 모르기에. 그렇기에 학교에서조차 이런 논의를 할수 없다고 한다. 양쪽 모두에게서 비난이 쏟아지는 형국이기에 말이다. 
그렇다면 그 사회는 어떤 이슈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그런 소수자에 대한 인식, 지원 정책, 교육 정책은 어떻게 해야 할까? 해결이란 것이 가능할까? 결국은 이런 논의조차 할수 없는 사회는 정말 민주주의 사회일까. 
나는 미국의 이 부분을 읽으며, 우리의 청년정책, 양성평등정책, 노인우대 정책등을 논하는 부분에서 지난 대선에 쏟아졌던 서로에 대한 비난이 생각났다. 여성을 이야기하면, 남성이 외면당했다고 말하던 이들, 노인을 말하면 청년이 외면당했다고 말하던 이들, 그 반대의 이들. 왜 우리는 문제에 대한 문제 제기 조차 못하는 사회가 되어 버렸을까. 모두가 침묵하고, 아니면 아예 대놓고 한쪽만을 지지하는 말도안되는 말들이 쏟아지는 것일까.

저자는 이 문제를 정치의 언어에서 설명하고 있다. 독단적 좌파와 극단적 우파의 언어를 통해서 말이다.
"절대선"을 추구하는 정치 역시 극우의 언어만큼이나 위험한 것. 그리고 미국의 좌파 즉 민주당이 놓치고 외면했던 부분, 그리고 '개탄스러운 자들'이라는 표현과 같이 잘못된 단어가 어떻게 상대의 분노를 이끌었는지, 그리고 그렇게 소외된 이들을 트럼프가 캐치하여 끌어들였는지를 말이다.

"그러나 자유주의는 개인의 보호만을 위한 철학이 아니다. 사회에서 상충되는 이해관계를 중재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p. 204

책을 어렵다고 느꼈던 이유 중 하나는 그러면 어떤 언어를 써야 하는가? 절대적인 선도, 절대적인 악도 아닌 중간의 언어는 과연 있는가? 그 누군가의 의도와 다르게 이해되는 언어의 한계 허용선은 어디까지 일까? 등이 기준을 잡는 부분이 명확치가 않아서 였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런 기준선의 무너짐은 선의의 말을, 누군가의 의견을 그 의견 자체로 놓고 판단하는 여유가 사라져서 일까. 요즘은 누군가에 대한 분노와 혐오 발언만 기억한다. 왜지? 
 노인에 대한 정책은 어떤 사회 취약층에 대한 정책일 뿐이다. 그것이 청년을 배제하거나, 아이를 배제하는 정책이 아닌것. 배제되었다는 생각이 들면, 그 사실을 우리는 또다른 이슈로 제기하면 되는 것이다. 대체 왜 우리는 그 자체를 자체로 바라보는 여유를 잊은 것일까? 
 아니면 정치의 언어가, 언론의 언어가 분노의 연료가 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책을 읽으며, 문득문득 잘못된 단어를 쓰는 대상이 정치일까? 언론일까? 아니면 우리 자신일까? 궁금하다. 결국은 모두겠지만, 정말 모두일까하는 생각이 든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듣고 말해야지. 정신 똑바로 차리고!

굿.

"본 도서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개인적인 감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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