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아주 재미있게 읽었던 장강명의 <먼저 온 미래>에는 조지 오웰과 찰스 디킨스의 이야기가 나온다. 책에서 조지 오웰을 더 호의적으로 심도있게 다뤄서인지, 나도 다시 읽어보고 싶어져서 올해 조지 오웰의 소설들을 읽을 계획을 세웠었다. 그러다가 조지 오웰이 여러 시기에 다양한 주제로 쓴 에세이들을 모아 담았다는 이 책을 발견했다.
<1984>, <동물농장> 같은 유명한 소설도 많이 남겼지만, 소설가이기 이전에 치열하게 치열한 에세이스트였던 조지 오웰이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들고 싶다’고 선언하며 남긴 글이 어떤 내용들을 담고 있을지 궁금한 마음을 가지고 읽기 시작했다.
책을 쓰는 건 고통스러운 질병과 오래도록 드잡이하는 것처럼 끔찍하고 소모적인 투쟁이다. 저항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어떤 악마에게 붙들려서 쓰기를 강요당하는 것이며 그게 아니라면 절대 하지 못할 일이 글쓰기다.
책을 읽으면서 조지 오웰에게 글쓰기는 단순한 창작 활동이라기보다, 진실을 드러내기 위한 투쟁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치열하게 고민하는 모습이 많이 보였다.
작가는 자기 개성을 제거하려고 지속적으로 애쓰지 않으면 재미있는 책을 쓰지 못한다는 것 역시 옳은 말이다. 좋은 산문은 유리창과 같다.
이 부분은 나한테 좀 어려웠다. 글이 작가라는 필터를 거치며 왜곡되지 않고 유리창처럼 독자에게 진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해야 한다는 비유는 인상적이었지만, 글을 쓰는 사람이 글에 드러나지 않는 게 현실적으로 그게 가능할까 싶었다. 너무 화려한 수식어로 개성만 뽐내다가 정작 내용이 가리지 않도록 주의하자는 이야기이지 않을까 멋대로 넘겨짚어 봤다.
우리 생각이 어리석기 때문에 영어는 추하고 부정확해지지만, 그렇게 지저분해진 영어 때문에 다시 우리 생각은 더 쉽게 어리석어진다.
조지 오웰은 언어의 몰락이 곧 생각의 몰락으로 이어진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정치적인 글에서 모호한 추상어나 진부한 관용구를 남발하는 것을 특히 경멸했는데, 이 부분에서도 잘 드러난다. 꼭 글을 쓰는 경우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가 결국 우리의 생각과 가치관을 만들어간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무심코 사용하는 언어 습관에도 늘 주의를 기울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있는 그대로 박력 넘치는 언어로 글을 쓰려면 용감하고 대담하게 생각해야 한다. 용감하고 대담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주류의 정치적 관념을 그대로 따를 수 없다.
주류의 의견이나 대중의 여론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언어’를 지켜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책을 읽으면서 새삼 깨달았다. 조지 오웰은 작가가 정치에 관여하더라도, 맹목적인 당파성에 매몰되지 않고 오직 시민으로서의 양심을 지킬 때 비로소 박력 있는, 자기만의 문장이 나온다고 강조한다.
자기과시와 자기 연민은 소설가의 독이지만 이 두 가지를 너무 두려워하면 창조적 재능은 위축된다. 좋은 나쁜 문학의 존재는 예술이 두뇌 작용과 동일한 것이 아님을 상기시킨다.
문학적 가치와 대중적 즐거움 사이의 오묘한 지점에 있는 책을 ‘좋은 나쁜 책’이라고 부른 것이 흥미로웠다. 지적인 완성도도 그렇지만 문학이 줄 수 있는 순수한 즐거움도 중요하다는 이야기 끝에 예시로 든 작품들 중에 내가 좋아하는 것들도 있어서 괜히 반가웠다.
모든 글에는 프로파간다의 측면이 있으나, 오랜 세월 지속 되어온 책이나 희곡이나 시는 그 도덕과 의미만으로는 포섭되지 않는 어떤 잔재를 갖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술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것의 잔재이다.
메시지가 강한 글일수록 예술로서의 생명력을 잃기 쉽지만, 조지 오웰은 그 한계를 넘어서는 ‘예술적 잔재’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 잔재가 남을 때 비로소 글은 시대를 초월하는 힘을 얻게 된다고 했는데, 조지 오웰 자신의 글들이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에게 읽히는 이유도 그 잔재 덕분이지 않을까 싶었다.
그냥 글도 어려운데 글 앞에 ‘정치’라는 말이 붙는 순간 어려움이 배가 되는 느낌이라서 정치적인 글은 섣불리 손 대기가 부담스럽고 조금 피곤하다. 조지 오웰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 태도’라고 말하며, 중립이라는 안전한 곳에서 나와 현실의 부조리에 맞서 정직한 언어를 지켜낼 것을 권한다. 책을 다 읽은 지금도 여전히 그 말에 따르는 건 쉽지 않지만, 조금씩이라도 책에서 강조한 내용을 글에 담을 수 있도록 조금씩 노력해봐야겠다.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