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감기나 다른 증상으로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을 일이 생긴다. 증상에 따라 각각 다른 의사를 만나게 되지만, 살아 있는 동안에는 아마도 만날 일이 없을 의사도 있다. 바로 법의학자다. ‘법의학’이라는 낯선 말을 나는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처음 들었다. 그리고 화면을 통해 만난 첫 법의학자는 이 책의 저자인 유성호 교수님이었다. 예전에 <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 간다>를 흥미롭게 읽었고, 유튜브 <유성호의 데맨톡> 구독자이기도 해서 데맨톡의 인기 강의를 엄선했다는 이번 책을 기대하며 읽기 시작했다.
부검 이야기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많을 줄 알았던 책은 의외로, 살아 있는 동안 알면 더 좋을 이야기들로 가득했다. 3,000건이 넘는 부검을 진행하며 죽은 몸에서 삶의 흔적을 찾기 위해 골몰해온 저자가 전하는 건강한 삶에 대한 지식들을 하나씩 읽다 보면, ‘부디 부검대에서 만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에 ‘이 책은 꼭 살아있을 때 읽어야 한다’는 책 속 문장이 더 와닿는다.
법의학자로서 저는 사망한 이들의 뇌를 들여다봅니다. 생명은 떠났지만, 그 뇌에는 그들이 살아온 삶의 궤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뇌를 관찰한다는 것은 단순히 병리학적 변화를 기록하는 일이 아니라, 그 사람이 마지막까지 어떤 과정을 겪었는지 되짚어 보는 일입니다. 그래서 뇌는 단순한 장기가 아닙니다. 한 인간의 갖아 깊은 이야기이자, 죽음을 넘어서도 남아있는 마지막 언어입니다. 61쪽
한 인간의 가장 깊은 이야기가 죽음을 넘어서도 뇌에 남아있다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마음이나 생각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말이 법의학자에게만은 예외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뇌는 단순한 장기가 아니라 내 삶을 증명하는 가장 구체적인 기록일지도 모르니, 앞으로 뇌를 좀 더 잘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건사고가 발생했을 때 부검을 의뢰하는 경우는 일반적으로 사망의 정황이 불분명하거나 그 원인이 모호한 때가 많습니다. ... 위는 때떄로 사망의 진실을 추적하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지만, 죽은 사람의 위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 88쪽
‘죽은 사람은 말이 없지만, 죽은 사람의 위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는 말이 유독 인상적이었고, 이 부분을 읽을 때 내가 마지막으로 먹은 음식이 뭐였는지도 떠올렸다. 평소에 무심하게 먹고 넘기는 한 끼가 어쩌면 진실을 말해주는 증거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신기하기도 하고 섬뜩하기도 했다.
소장은 우리가 가만있을 때도 끊임없이 운동을 계속하는 부지런한 장기이지만, 우리가 걷고 뛰면서 적극적으로 신체 활동을 하면 덩달아 더 활발하게 움직입니다. 반대로 침대에 오래 누워있는 경우, 이를테면 골절로 거동이 어려운 노인들은 소장의 운동이 느려지면서 변비나 장폐색의 위험이 올라갑니다. 신체적 운동과 소장의 운동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보면 되는 것이죠. 107쪽
한 기관이 몸 전체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소장 이야기를 읽으며 새삼 느꼈다. 각 잡고 제대로 운동하지 않을 때도, 적어도 소장이 조금 더 활발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자주 몸을 일으켜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DNA는 단지 범인을 찾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한 개인이 누구인지, 어떤 유전적 특성을 지녔는지, 어떤 조상으로부터 왔는지를 담은 살아 있는 기록입니다. 과학은 이 기록을 점점 더 정교하게 해석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우리는 이제 DNA를 토대로 인간의 삶과 죽음을 새롭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DNA는 각자의 몸에 새겨진 고유한 서사이며, 누구도 바꿀 수 없는 생물학적 신분증입니다.
207쪽
DNA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책이나 영상으로 자주 접해서 특별할 게 없을 줄 알았는데, 법의학자의 말로 듣는 이야기는 또 새로웠다. 특히 ‘각자의 몸에 새겨진 고유한 서사’라는 말이 유독 마음에 남았다.
저는 부검실에서 수많은 시신과 마주합니다. 유독 술로 인해 생명을 잃은 사람들을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외상 사고, 급성중독, 장기 손상, 자살, 익사 심지어 너무 평범한 밤의 귀갓길에서도 술은 조용하지만 치명적인 원인으로 작용합니다. 어떤 날에는 ‘만약 이분이 술을 마시지 않았다면 지금 여기에 누워 있지 않았을 텐데......’라는 안타까움이 가시지 않습니다. 251쪽
이렇게 다양한 죽음의 원인이 술일 수도 있다는 게 새삼 놀라웠다. ‘조용하지만 치명적인 원인으로 작용한다’는 말이 와닿았고, 일상에 이미 많이 스며든 술이 얼마나 쉽게 삶을 무너뜨릴 수 있는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올해 유독 ‘몸’에 대한 관심이 많아진 건지 관련 책을 꽤 읽었다. 그중 여름에 읽었던 남궁인 작가님의 <몸, 내 안의 우주>가 이 책을 읽는 동안 여러 번 떠올랐다. 응급실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사람을 어떻게든 삶으로 끌어오려고 애쓰는 사람과 이미 죽음의 영역으로 넘어간 누군가의 몸에서 어떻게든 ‘삶의 흔적’을 찾으려 애쓰는 사람. 서로 다른 자리에서 인간의 몸을 마주하기에 분명 다른 점도 있지만, 두 책 모두 살아 있는 사람의 건강을 염두에 두고 쓴 이야기라는 점에서 닮아 있었다.
<시체는 거짓말하지 않는다>를 읽으면서 죽음 이후 내 몸에 남을 흔적들을 떠올려보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책을 덮고 나니, 살아있는 동안 내 몸을 좀 더 아끼고 건강하게 유지해야겠다는 생각이 깊이 남았다.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