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나는 술이랑 별로 가깝지 않다. 일단 주량이 가소로워서(주종 상관없이 2cm, 섞이면 1cm) 맛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을 만큼 마실 수가 없다. 내가 직접 적극적으로 술을 찾아 마시지는 않더라도, 사회생활을 할 때나 술 좋아하는 친구들을 만날 때 분위기를 깨지 않을 정도의 술(그리고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가 있었으면 해서 종종 술 관련 책이나 영상을 들여다볼 때가 있다. 이 책에도 그래서 더 관심이 갔다.
재미있게 봤던 드라마 <술꾼도시여자들>의 원작 작가님이 술에 대한 애정을 담아 그리고 쓴 술 만화 백과라니. 보나마나 재미있을 것 같은데 술 지식도 쌓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이 책은 제목만으로도, 술에 관심은 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는 알쓰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서양술과 동양술로 나누어 20종류의 술을 소개하고 있는데, 막연히 회식에서 자주 접하던 동양술이 더 익숙하지 않을까 했더니 의외로 서양술 쪽에 아는 이름이 더 많았다.
과로가 너무 당연하던 시절, 내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 무던히 애쓰던 그 시절 느긋하게 마실 여유 따위 없이 빨리 마시고 빨리 취해서 빨리 집으로 돌아가 다시 내일을 준비하기 위해 폭탄처럼 취기가 확 터지는 이 술이 필요했던 게 아닐까. <폭탄주>
워낙 술에 대한 애정과 지식이 깊은 분이다보니 술 이야기도 흥미로웠지만, 그 술과 얽힌 에피소드들이 다 재미있었다. 흑역사도, 폭탄주가 넘실거리는 회식도 잘 못 견디는 공통점을 발견해서 괜히 더 반갑고 내용에도 깊이 공감했다. 대체로 웃으며 읽다가도 어느 순간 찡해지는 부분도 있었는데, 나에게는 폭탄주 파트가 그랬다. 회식은 알쓰에게만 괴로울 줄 알았더니, 술꾼들에게도 즐길 수 없는 술자리가 괴롭기는 마찬가지겠다는 생각을 했다.
40도쯤 되는 위스키를 샷으로 마시면 우리의 소중한 내장 기관이 어디쯤에 위치해 있는지 생생하게 느껴볼 수 있다. ... 이렇게 마시면 맛도 충분히 못할 뿐더러 식도와 위장에도 무리가 가므로 마시는 방법을 바꿔야 했다. <위스키>
40도가 넘어가면 그냥 에탄올 아닌가요... 하며 애송이 같은 소리를 했더니, 바로 뒤에 75도짜리 바카디를 스트레이트로 마셨다는 이야기가 이어져서 눈을 의심했다. 괜히 위스키를 이리저리 뭔가랑 섞어서 순하게 만들어 마시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인간은 참 자기중심적인 종족이라 어떤 사물을 봐도 거기서 얼굴을 찾아내는 습성이 있어 매대에 놓은 수많은 와인 중 사람 얼굴이 보이면 저절로 시선이 가기 마련이다. 그래서인지 얼굴 레이블의 와인이 점점 많아지는 느낌! <와인>
어디선가 라벨에 사람 얼굴이 그려진 와인을 보고 이런 것도 있다며 신기해 했었는데, 그 내용도 책에 나와서 더 관심을 가지고 읽었다. 종류가 생각보다 다양하다는 것에도 놀랐고, 거기에 마케팅적인 의도가 섞여 있다는 것에도 새삼 놀랐다.
사소하지만 도움이 되는 삶의 지혜를 하나 알려드리죠.
내가 뭘 좋아하는지 소문을 내자!
그게 나에게로 올 것이다! <고량주>
이 방법으로 작가님에게는 고량주가 모여들고 있다고... 그러고 보니 고양이 그림이나 사진이 들어간 물건들이 우리 집에 곧잘 들어오는 것도 이 원리인 것 같다. 앞으로 돈을 좋아한다고 더 가열차게 소문을 내고 다녀야지.
희석식 소주는 술맛 자체가 뛰어나거나 개성이 있진 않습니다만
지글지글 기름진 고기에도 잘 어울리고 쫄깃한 회나 해산물과도 잘 어울리고 매콤한 볶음이나 국물에도 아니, 그냥 아무 밑반찬에도 잘 어울리는 술이지요. 뒤로 슬쩍 물러나 안주를 돋보이게 해준달까요.
<희석식 소주>
아무래도 스스로 술을 찾아 마시지 않는 나같은 사람에게는 회식 자리에서 자주 봐서 제일 익숙한 초록병 소주 파트를 읽으면서, 드디어 아는 술이 나와서 반가운 마음이었다. 진로 소주의 도수가 1920년대에는 무려 35도였다고 해서 놀라웠다. 100년 동안 야금야금 20도나 떨어져서 그나마 나도 마실 수 있게 되었다.
막걸리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술. 삼국시대 이전부터 마신 것으로 추정된다. 명칭의 유래는 놀랍도록 단순하다. '막 걸러'서 막걸리. 여기서 '막'은 '방금'도 되고 '마구'도 된다. <막걸리>
막걸리가 오래됐을 줄은 알았지만 삼국시대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갈 줄은 몰랐는데, 생각보다도 역사가 더 오래된 걸 알고 놀랐다.
올해도 나는 매실주를 담글 것이다. 이번엔 망각해서가 아니라 기억하기 위해서. 훗날 즐겁게 기억할 수 있도록 올해도 술을 담가야지. 그리고 어린아이처럼 매순간을 즐겨야지. <매실주>
큰이모가 매년 매실청을 만들면서 이 짓도 올해로 마지막이라는 얘기를 매년 반복하시는데, 작가님도 매실청 대신 매실주를 담그면서 매년 같은 말씀을 하신대서 웃었다. 어느 해에 담근 매실주는 아이가 성인이 되면 다 같이 열자고 하는 장면을 보면서 괜히 뭉클했는데, 아이가 시크하게 그게 그때까지 남아있겠냐고 하는 걸 보고 터졌다.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봐서 그런지 역시 부모님잘알...
누군가가 지극히 좋아하는 대상에 대해 열정적으로, 심지어 재미있게 펼치는 이야기를 읽다 보니 왠지 나도 심정적으로 술과 더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마음이 가까워졌다고 해서 주량이 늘지는 않았을 테지만, 가까운 사람들과의 술자리에서 술을 고를 때 더 적극적으로 참견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검은 속내). 술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나처럼 술과 가깝지 않은 사람에게도 다 재미있을 것 같은 책이었다.
*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