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을 어슬렁거리다가 한국소설 코너를 볼 때면 이 책에 꼭 한 번씩 눈길이 갔다. 정세랑의 소설들을 좋아하는 데다가 역사 미스터리도 좋아하니까, 내 취향의 키워드를 몽땅 쏟아부어놓은 이 책이 재미있겠다고 생각하면서도 희한하게 자꾸 다음으로 미루게 되었다. 그러다가 올해 초 서점에서 설자은의 새로운 표지를 발견하고 리커버인가 하고 들춰봤다가 이 이야기가 시리즈라는 걸 알고 이제는 더 미루지 말고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책을 사왔다.
이야기의 배경은 지금으로부터 한참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통일신라 시대다. 줄거리를 거칠게 정리하면 당나라 유학을 앞두고 갑자기 죽은 오빠의 자리를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차지한 설자은이 다시 금성으로 돌아와 여러 사건들을 해결하는 이야기인데, 사건 자체도 흥미진진했지만 등장인물들이 다 입체적이고 매력있어서 더 재미있게 읽었다.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 책의 맨 앞에 있었던 짤막한 안내인데, 없었던 사람들의 없었던 사건들이라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이 시기의 기록과 유물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게 역사학자들에게는 아쉬운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에게는 상상으로 채울 수 있는 부분이 많아서 좋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설자은과 그 형제들도 매력이 있었지만, 내가 유독 마음을 쏟았던 인물은 백제 출신 목인곤이었다. 나라는 망했고, 설자은의 집에 식객으로 기거하는 처지인데도 전혀 기죽지 않고 설자은과 함께 다니며 활약하는 인물인데, 틈만 나면 백제부심을 부리고 묘하게 신라를 낮잡아 보는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내가 삼국 중에 백제를 제일 좋아해서 그럴지도.

요즘도 보통 때는 딱히 의식하지 않다가도 현충일이나 광복절에는 나라를 위한 누군가의 희생을 생각하게 되는데, 그 시절 통일신라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흥미로웠다.

하는 말의 70%는 농담이나 깐족거림인 것 같은 목인곤이 가끔 설자은을 짠하게 여기면서 말을 아끼거나 배려 섞인 대답을 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내가 위로를 받는 기분이었다. 한편,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왜 그렇게 깐족거려요... 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미은이 원래 이름을 버리고 오빠 ‘설자은’의 삶을 살게 만든 장본인인 큰오빠 호은은 내가 보기에도 가끔 밉상이었다. 사람을 잘 긁어서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만드는 지략이 있어서, 밉상이라고는 했지만 매력있는 인물이었다.

그동안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 고구려와 백제 유민들의 생활은 교과서에 언급된 정도로만 떠올려봤을 뿐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이 부분을 읽으면서 고구려에 비해 백제와 신라의 골이 훨씬 깊었겠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의 모습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아보거나 상상해본 적이 없었는데, 소설 속 금성의 모습을 읽으면서 얼마나 복잡한 상황이었을지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목인곤이 저런 식으로 신라 사람 설자은을 앞에 두고 은근히 신라를 깔(!) 때가 제법 있어서 조마조마하면서도 재미있었다.

설자은의 형제 자매 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인물은 바로 아랫동생인 도은이다. 속으로는 투덜거리면서도 말을 들어줄 때가 많은 자은과 다르게 도은은 큰오빠 호은이 수 틀리게 굴면 참지 않는 편. 노름판을 기웃거리다가 걸린 호은에게 벼루도 막 집어던지고 말도 거르지 않아서 도은이 나오는 장면은 대체로 속이 시원했다.

그런 도은도 질리게 만드는 사람이 바로 목인곤이라는 것. 그렇지만 그 어느 누구의 눈치도 안 보는 것 같은 목인곤도 도은 눈치는 살짝 본다. 아무래도 도은이가 설자은 집안의 실세라서...

호은의 이목구비를 설명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도, 차라리 때려라 도은아... 하면서 좀 웃었다. 거기에 한 술 더 뜨는 목인곤.

웃으면서 읽을 수 있는 부분도 많지만, 설자은이 왕과 대면하는 장면은 나까지 긴장될 때가 많았다. 그 시절에는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왕이 너무 눈치보게 만들잖아요...
두 번째 책까지 다 읽고 나니까 다음 이야기가 있다는 게 다행인 한편, 기다려야 한다는 게 슬프기도 했다. 이야기 자체도 재미있었고, 한번도 구체적으로 상상해본 적 없는 통일신라시대의 모습을 나도 같이 그려볼 수 있다는 게 좋았다. 세 번째 책도 얼른 나왔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