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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서재
  • 이번 역은 요절복통 지하세계입니다
  • 이도훈
  • 16,020원 (10%890)
  • 2024-06-28
  • : 1,860

고등학교까지는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였지만 대학교부터는 상황이 달라졌다. 경기 남부에서부터 서울 한복판까지 4년 내내 지하철 통학을 했고, 졸업과 동시에 입사했던 회사는 심지어 대학교에서부터도 여섯 정거장 더 멀어졌다. 날마다 지하철, 그것도 1호선으로 3시간 이상의 통학과 통근을 거치면서 온갖 지하철 빌런들을 봤다. 1호선은 충남에서부터 경기북부까지 커버하는 긴 노선이다보니 광인들의 인력풀도 상상초월로 풍부한 편이라서 온갖 종류의 사람들을 다 봤다. 사람도 사람이지만 정말 괴로운 건 분초를 다투는 출근길에, 열차 간격 조정같은 사소한 것들부터 차체 고장 같은 심각한 내용으로 운행이 지연되는 일이었다. 학생 때는 막연히 낡은 열차와 누군지 모를 관계자를 그저 원망했는데, 직장인이 되고 나서는 기관사든 다른 직원이든 우리 모두 같은 직장인인데 아침부터 식은땀 나겠다고 안쓰러운 마음을 가지기도 했다.

매년 주시하고 있는 브런치북 대상 중에 이번에 기관사의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알고 책이 나오기 전부터 기대하고 있었다. 다른 이야기들도 독특하고 읽어보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았지만, 지하철처럼 나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소재가 또 없을 것 같아서 유독 눈이 더 갔다. 존재는 알고 있지만 지하철에 타서부터 내릴 때까지 마주칠 일은 좀처럼 없는 기관사의 하루를 알고 싶은 마음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을 읽다보면 공공성과 정시성이라는 말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모두가 같은 마음은 아닐지 모르지만 기관사들이 자신의 일을 대하는 마음에는 사명감과 책임감이 더 진하게 담겨 있어서 일반 직장인과는 약간 결이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열차 지연이나 서행에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내가 탄 지하철이 나를 집 근처 역까지 데려다줄 거라는 사실을 의심해본 적은 없었다는 걸 책을 읽으며 깨달았다.



아마 나를 포함해서 지하철을 타는 사람들 중에 스크린 도어와 지하철 문 간격이 벌어져서 그걸 맞추느라 시간 걸리는 걸 겪어본 사람들이 많을 텐데, 왜 그렇게 시간이 걸리는지 이번에 알았다. 퇴행 운전에는 관제의 허가가 필요하고, 만약 융통성 있게 사후 보고를 하고 마음대로 퇴행 운전을 하면 벌금 150만원이라고... 그걸 읽었더니 앞으로는 퇴행 운전에 시간이 좀 걸려도 이전처럼 답답해하지 않을 것 같다.



생각보다 다양한 물건이 유실물센터로 들어온다는 걸 보고 남일 같지 않아서 웃긴데 웃을 수가 없었다. 우산을 다섯 개쯤 유실물센터로 보낸 후부터 나는 지하철에서 손에 든 물건을 아무것도 놓지 못하는 병에 걸렸다. 


이미 타고 내릴 사람들은 다 행동을 완료한 것 같은데도 지하철이 움직이지 않을 때, 대부분은 앞차와의 간격 유지라는 방송이 나온다. 그런데 가끔 앞 역에서 사고가 났다는 방송이, 그것도 사상사고라는 방송이 나오면 가슴이 철렁하다. 동시에, 스크린도어가 설치됐는데도 그럴 수가 있나 하는 생각과 함께 사고 현장을 맨 앞에서 피할 도리 없이 보셨을 기관사를 걱정하게 된다. 실제로 기관사들이 받는 충격과 상처는 내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거라는 걸 읽으면서 스크린도어 이상의 안전 장치가 필요한 건 아닐까 생각했다.


어느 회사에서건 일단 출근하면 커피 타임을 가지면서 업무 시작 전에 예열하는 시간을 가졌었는데 기관사들도 마찬가지라는 걸 알고 괜히 반가웠다. 요즘은 형태가 조금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자판기 앞에 후배들을 줄 세워 놓고 커피를 한 잔씩 사 먹였다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내 마음이 괜히 훈훈했다. 정작 나는 부장님이 커피 마시러 가자고 하면 썩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책을 읽으면서 잘 몰랐던 기관사들의 일과 생활에 대해 알 수 있었던 것도 좋았지만, 일을 하면서 깨달은 점을 삶과 연결해서 풀어낸 이야기들도 좋았다. 


이건 첫 줄을 읽는 순간 냉난방일 줄 알았다. 아마 지하철을 타는 사람들은 모두 짐작했을 것 같다. 주말에 부모님 댁에 가면 엄마와 아빠의 희망 온도에도 차이가 극심한데, 하물며 지하철에 탄 사람들의 희망 온도를 모두 맞춰주는 건 당연히 불가능하겠지. 문제는 냉난방 민원이 너무 쉬워졌다는 게 아닐까 싶었다. 아무 민원이 없을 때 오히려 더 불안해진다는 부분을 읽으면서는 웃다가도 짠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어떤 공휴일에도 지하철이 다니지 않는 건 본 적이 없다는 걸 책을 읽으며 새삼 깨달았다. 심지어 해가 바뀌는 날은 쉬기는커녕 보신각 타종 행사 때문에 연장 운행을 하던 1호선을 떠올리고 왠지 숙연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나도 알람 강박이 제법 있는 편이라서 알람을 완전히 끄고 자는 주말이 아니면 잠을 깊게 못자는 느낌이라서 가끔 괴로운데, 기관사들의 알람 강박에는 댈 것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게 나는 알람을 못 듣고 지각을 해도 그냥 나 혼자 근태 점수를 깎아먹는 정도지만, 지하철은... 생각만 해도 아찔해진다.


부산에도 무인 경전철이 다니듯 수도권에서도 신분당선이 무인 열차로 운행되고 있다. 신분당선을 타면서 이러다 나중에는 기관사 없이 다 무인 열차로 다니는 건 아닐까 생각을 간혹 했었는데, 역시 당사자인 기관사들도 그 생각을 하게 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환경이 달라지면 근무 형태도 그에 맞춰서 바뀌는 게 당연하다는 말을 읽으면서 이미 그 업계(!)에서도 변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을 놓았다.


이 책의 배경은 부산이다. 시간이 한참 지나기는 했지만 나도 부산 여행 중에 부산 지하철을 여러 번 탔었는데, 책을 읽는 동안 혹시 2호선을 타지는 않았는지 여러 번 내 과거 여행 경로를 확인했었다. 언제가 될 지는 모르겠지만 부산에서 다시 지하철을, 그것도 2호선을 탄다면 괜히 반가운 기분이 들 것 같다. 그리고 이제 기관실 안의 상황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으니, 매일 아침 회사로 향하는 지하철에서 서행이나 간격 조정, 혹은 퇴행 운전으로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예전보다는 짜증을 덜 내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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