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보다 사랑하는 가족이지만 인간 대 인간으로는 정말 맞지 않는 안타까운 경우가 있다. 우리 집에서는 엄마와 내가 그렇다. 어릴 때부터 엄마가 더 좋은지 아빠가 더 좋은지 물으면 엄마가 없는 자리에서는 1초의 고민도 없이 아빠를 외쳤고, 엄마가 있는 자리에서도 고민하는 시늉을 좀 오래하다가 ‘요즘은’ 아빠라고 농담을 섞어서 대답하곤 했다. 엄마도 자식 셋 중에는 알게 모르게 내가 제일 껄끄러운 눈치기는 하다. 둘이 인간적으로는 지독하게 안 맞지만 그래도 나름의 진득한 애정이 있어서 썩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하며 살고 있다.
엄마와의 관계가 아주 절절하지 않아서일까, 다른 사람들이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쓴 책을 읽을 때면 나는 그 자리에 아빠를 대입하며 읽곤 했다. 제목부터 엄마에 대한 절절한 마음이 느껴지는 <엄마의 딸이 되려고 몇 생을 넘어 여기에 왔어>도 그렇게 읽지 않을까 생각하며 펼쳐 들었다. 제목만 읽었을 때는 엄마와의 관계만 집중적으로 풀어낼 줄 알았는데 저자가 어릴 때부터 주변 사람들과 맺은 관계, 그리고 그들과 주고받은 애정들이 다양하게 담고 있어서 더 흥미로웠다.
이야기마다 붙은 모든 소제목에는 그 이야기의 중심 인물과 저마다 다른 음식 이름이 들어있었다. 음식 이름이 들어있어서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작가의 말 제목이 ‘식구, 서로를 먹여살리느라 우리가 주고받은 상처와 슬픔에 대하여’라는 걸 보고 어떤 의미인지 이해했다.
책에는 저자뿐만 아니라 읽는 내 마음까지 상하게 하는 사람들이 더러 등장했다. 훔치지 않은 연필을 훔쳤다고 몰아세우는 교사가 그랬고, 바람기로 여러 첩을 두며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들의 마음에 상처를 준 아버지의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그랬다. 그런데 책을 덮고 나서도 제일 오래, 은은하게 섭섭하게 만든 사람은 빗속에 조카를 몇 시간이나 기다리도록 세워놓고도 근처에서 팔고 있던 단팥빵은커녕 따뜻한 말 한 마디 건네지 않은 외삼촌이었다. 글로만 읽은 나도 이렇게 섭섭한데 어릴 때 직접 겪은 저자의 마음이 어땠을지 읽는 내내 내가 빈정이 상했다.
저자를 섭섭하게 만들고 상처를 준 사람들도 있지만 저자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인데도 가족보다 더 살뜰한 사랑을 쏟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연필 도둑으로 몰렸을 때 학교를 뒤집어놓아 사이다를 선사한 띵까 영감과, 작은 아버지도 모른 척했던 저자의 어려운 상황을 도와줬던 친구 아버지의 이야기가 특히 인상적이었고 오래 기억에 남았다.
저자도 사랑을 받기만 한 건 아니었다. 몸이 약한 언니와 태어나자마자 다른 집에 양녀로 갈 뻔했던 동생을 살뜰하게 챙기는 이야기를 읽으면서는 우리 집 둘째를 생각하며 대체로 둘째들의 포지션이 이런가 싶어서 고마움과 짠함을 동시에 느꼈다. 우리 집 첫째(나)는 건장하고 튼튼하지만 왠지 모르게 둘째의 보살핌을 받고 있는 느낌이라 더 그렇다.
어머니도 쉬지 않고 일하시며 억척스럽다고 할 정도로 열심히 사셨지만, 어머니를 닮아서인지 저자의 삶도 항상 뭔가로 빼곡하게 차있는 느낌이었다. 야간대학에서 가난한 남편을 만나 결혼해서 삶을 꾸려나가는 부분에서는 그 시절의 사회 모습들도 함께 볼 수 있어서 가까운 어른이 들려주는 옛날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었다.
어머니라고 되어있지만 시어머니의 이야기다. 냉면을 먹으러 가자고 며느리를 데려가서 사리 추가까지 해서 야무지게 드시고는 화장실에 간다고 사라진 시어머니의 에피소드를 읽으며 뒷목을 잡았다. 돈 한푼 가져가지 않아서 어린 아이를 데리고 냉면집에서 당혹스러움과 수치심으로 어쩔 줄 모르던 젊은 저자의 심정이 너무 와닿아서 읽는 동안 나도 함께 수치스러웠다. 이후에 그것이 어쩌면 치매 증상이 시작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부분을 읽으면서 머리로는 상황을 이해했지만, 그래도 마음이 말끔해지지는 않았다.
문제의 아버지. 전쟁 때 많은 사람이 그랬듯 이북에 부모와 처자식을 두고온 아버지는 혼자 살겠다고 내려왔다는 죄책감으로 젊은 시절 마음을 잡지 못했다고 한다. 결혼을 하고 나서는 마음을 붙이셨으면 좋았으련만, 책을 읽다보니 마음을 너무 여러 곳에 두고 사셨던 것 같다. 자연히 가족들에게는 애증의 대상이었고, 저자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그 아버지와의 공통점을 하나씩 찾을 때마다 드는 오묘한 감정들을 읽으면서, 내가 질색하는 엄마의 어떤 특성들을 나한테서 발견할 때 느꼈던 감정들이라서 깊이 공감했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읽으면서는 여러 번 혀를 내둘렀다. 수완과 행동력 모두 뛰어난 저자의 어머니는 이미 한국에서도 누구보다 많은 일들을 해내며 자식 넷을 길러냈다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남편을 따라 이민을 갔다가 과부가 된 저자의 동생을 챙기러 페루로 떠난 엄마가 그 동네 사람들 전체의 엄마가 되는 모습을 보면서, 엄마의 억척은 태산을 옮긴다는 저자의 말을 완전히 이해했다.
전에 퀸시 존스의 책에서 삶 그 자체가 성취라는 말을 읽으면서 어렴풋이 의미를 짐작하는 정도였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누군가가 살아온 흔적들을 낱낱이 들여다보니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조금 더 피부로 와닿았다. 어느새 다 잊어버리고 나 혼자 자라온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살고 있었는데, 어릴 때부터 정말 많은 사람들이 쏟는 애정을 받으며 어른이 됐다는 걸 책을 읽는 동안 나도 함께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