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술을 잘 못한다. 합법적으로 술을 마실 수 있게 된 후부터 주량에 대해 질문받는 일이 많아졌는데, 그때마다 나는 주종 상관 없이 2cm라고 답한다. 애초에 주량이라는 건 무엇이 기준일까 애매해서 나는 내가 기분이 딱 좋을 정도가 되는 시점을 기준으로 정했다. 아빠를 닮아서 술을 한 방울만 마셔도 들통으로 마신 것처럼 얼굴이 빨개져서 밖에서 술을 마시면 항상 취하기 전에 같이 마시는 사람들에게 술잔을 빼앗기곤 했다. 다행히 술을 썩 좋아하지도 않아서 아쉬울 때는 별로 없지만 가끔 기분을 내고 싶을 때는 집에서 조용히 혼술을 한다.
그렇게 나름 드문드문 혼자만의 음주 생활을 즐기던 중에 드라마 술꾼도시여자들을 재미있게 보고 술을 자유자재로 마시는 모습을 살짝 동경하게 되었다. 드라마를 볼 때 나는 병 단위로 술을 마시려면 다시 태어나야겠군...하면서 제로 맥주나 느린마을 막걸리를 (2cm) 따라 놓고 기분을 냈다. 그 술꾼도시여자들의 웹툰과 드라마 작가의 추천을 받은, 여성 술꾼들의 역사이야기를 담은 책이 어느날 내 눈에 띄었다. 술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쓴 책을 술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들이 추천했다니, 술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던 나도 한번쯤 읽어보고 싶어졌다.
아직 본문이 시작되기도 전에, 역사 속 어느 시대에 술잔을 잡았어도 결과가 화형으로 수렴되었을 거라는 추천사를 읽으면서 도대체 이 책에 무슨 내용이 담겨있는 건가 슬슬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술의 역사를 담고 있는 책답게 그 기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알코올은 발명이 아니라 발견되었을 거라는 내용도 흥미로웠고, 함무라비 법전이 만들어지기 이전에는 여성이 술과 관련된 분야에서 주체적인 입장이었다는 것도 새로웠다. 책에서는 15개의 챕터로 나누어 문명이 시작되는 먼 옛날부터 최근까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책에서 다루고 있는 역사 속 인물들 중에서는 처음 보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흥미진진했지만 아무래도 내가 이름을 한번쯤은 들어본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올 때 더 집중하며 읽게 되었다. 과음을 하는 건 아니지만 술을 정말 좋아하던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가 주축이 되어 만든 '흉내 낼 수 없는 간'이라는 단체 이야기도 흥미로웠고, 내가 대강만 알고 있었던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조금 더 알고 싶어졌다. 클레오파트라에게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은 로마 역사가들의 입장에서 서술된 이야기만을 읽어왔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중국 시인 이청조의 이야기도 인상적이었다. 그당시에 금기시 되던 술과 욕망을 소재로 삼은 시를 지어서 남성 평론가들에게는 괴물 취급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평론가들조차 이청조의 능력은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는 내용을 보면서 이청조의 시를 읽어보고 싶어졌다. 책에도 인용된 시가 있었는데 이정도면 서정시 아닌가 싶을 정도로 잔잔한 시였다.
클레오파트라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느꼈지만, 음주 자체가 아니라 과음이 문제라는 걸 예카테리나 챕터를 읽으며 다시 한번 느꼈다. 책 속에는 이렇게 모르는 사람이 드물 정도로 정말 유명한 인물들의 이야기도 있지만, 술의 전반적인 역사를 다루면서 낯선 인물들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아픔을 이기기 위해 데킬라를 마시겠다는 멕시코 가수의 이야기도, 금주령의 시대에 술을 만들고 마시고 팔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도 흥미진진했다.
책을 처음 손에 들었을 때 생각했던 것보다 분량이 많아서, 술에 대해서는 완전히 문외한인 내가 끝까지 다 읽을 수 있을까 살짝 쫄았는데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책의 머리말만 읽어도 저자가 술에 얼마나 진심인지, 그리고 그 좋아하는 대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얼마나 좋아하는지 느껴졌다. 역사, 술, 여성이라는 키워드가 자칫 딱딱하고 무겁게 느껴질 수 있지만 책을 읽는 내내 그냥 술자리에서 박학다식하고 말빨좋은 재미있는 언니가 알쓸신잡 스타일로 이야기를 늘어놓는 느낌이었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읽어보면 좋겠다.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아 읽고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