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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서재
  • 스토리 설계자
  • 리사 크론
  • 16,650원 (10%920)
  • 2023-06-23
  • : 2,995

이렇게 말하면 너무 mbti에 과몰입하는 느낌은 있지만, 네 자리 중 두 번째 자리가 N인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공상에 가까운) 생각을 많이 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나는 mbti 검사를 최초로 했던 대학생 때부터 최근까지 계속 같은 유형이 나온다. infp인데 p와 j는 그럭저럭 60:40 정도로 반반 느낌인데, n과 s는 80:20 정도로 n의 비중이 월등히 높다. 심지어 가족 구성원 전원의 둘째 자리가 다 n이라 기본적으로 다들 쓸데없는 상상들을 많이 해서, 나는 다들 이렇게 들숨에 공상을 하고 날숨에 망상을 하며 사는 줄 알았다. 

그러다가 어느날 이렇게 공상만 할 게 아니라 이야기로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막연히 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아이디어 노트를 쓰기 시작했다. 막상 써놓으려니 너무 평범한 것 같고 재미가 없을 것 같아서 아이디어를 써놓는 것도 쉽지 않았다. 아이디어가 10개쯤 모이면 그중 하나는 써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고, 올해 초 10개가 찼다. 그리고 공상을 하는 것과 그 공상을 짧게 적어놓은 아이디어로 한 편의 이야기로 완성하는 건 완전히 다른 차원이라는 걸 한글파일을 켜는 순간 깨달았다. 마감이 있는 것도 아니니 이건 천천히 생각해보자고 슬쩍 미뤄놓고 지내다가 스토리 설계자 출간 소식을 듣게 되었다. 어쩌면 미뤄놓은 이야기를 완성할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읽기 시작했다.


스토리의 축은 외적 투쟁이 아니라 내적 투쟁이다. 주인공이 '외적' 플롯으로 인해 발생한 문제를 풀기 위해 '내적'으로 무엇을 깨닫고 무엇을 극복하고 무엇을 감당해야 하는가가 중요하다.

책을 펴고 들어가는 글을 읽으면서 이미 '아 나는 시작부터 완전히 잘못 쓰고 있었구나'라고 느꼈다. 아무리 매력적이고 흥미진진한 사건들을 꽉꽉 채워도 그걸 관통하는 하나의 '내적' 투쟁이 뚜렷하지 않으면 독자들에게 크게 와닿지 않을 수 있다는 내용을 읽으면서 그동안 내가 읽었던 매력적인 이야기들이 대부분 그랬다는 걸 깨달았다.


작가들이 골치 아플 수밖에 없는 게, 스토리에 반응하는 행동이야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아무 생각 없이 할 수 있지만, 독자의 뇌를 장악하는 스토리를 '쓰는' 능력은 처음부터 타고 나지 않는다.

이 부분도 공감하며 읽었다. 가끔 스토리나 소재는 평범한데 작가가 글을 너무 잘 쓰는 바람에 필력에 멱살 잡혀서 끝까지 읽는 경우가 드물게 있지만, 반대로 소재가 너무 독특하고 스토리가 참신해서 글 자체는 살짝 아쉽지만 끝까지 읽게 되는 경우가 더 많다. 책에서 예로 든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는, 빈말이라도 작가가 글을 잘쓴다고 할 수는 없는 수준이지만 스토리의 힘으로 1억부가 넘는 판매고를 올렸다고 한다. 문장을 갈고 닦는 일도 물론 중요하지만 스토리를 체계적으로 만드는 노력이 우선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토리텔러로서 당신이 할 일은 주인공이 무엇을 깨닫는다고 말로 일러 주는 게 아니라, 주인공에게 그 깨달음을 가져다주는 사건 속에 독자를 떨어뜨려 놓는 것이다. 작가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가 장면 속으로 너무 늦게 뛰어드는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이런 내용을 마주칠 때마다 '정말 그랬나?' 하며 그동안 재미있게 읽었던 문학 작품들을 떠올려 봤는데 거의 예외없이 들어맞아서 신기했다. 독자한테 하나부터 열까지 다 설명하지 말고 주인공의 머리, 주인공이 겪는 사건 속에 떨어뜨려 놓으라는 말이 와닿았다. 구구절절 설명을 하는 게 이미 개연성이나 설득력이 약하다는 증거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읽었다.


작가들이 가끔 저지르는 실수가 있다. '아이의 생각'을 지나치게 단순하고 피상적이며 뻔하게 그리는 것이다. 전혀 그렇지 않다. (...) 아이들 생각은 더 원초적이기에, 어른들 생각보다 훨씬 정직할 때가 많다. 사고의 깊이도 어른보다는 깊지 않을지언정 어른 못지 않다.

이야기를 쓰려고 이것저것 작법서를 찾아보며 캐릭터를 잡아가려고 할 때 나한테는 '어린이'가 가장 어려웠다. 내 어린이 시절은 너무 한참 지나버렸고, 가까운(!) 어린이가 없어서 기준을 잡기가 쉽지 않은가 싶었는데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내가 어린이를 너무 뻔하게만 그리고 있지 않았나 반성했다. 책에서도 언급한 <앵무새 죽이기>,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은 나도 정말 좋아하는 소설인데, 다시 읽으면서 어린이를 어떻게 그렸는지 살펴야겠다고 생각했다.


"왜?"라고 질문하면서 뿌연 안개를 몰아내고, 스토리의 인과경로를 머릿속에 명확하게 그려 금방이라도 생동할 것처럼 만들 수 있다.

그리고 그 물음의 답은 항상 과거에 있다.

드라마나 책을 볼 때 처음에는 도대체 누가 이런 (긍정적으로) 미친 생각을 했을까 소름끼쳐하며 읽다가 끝날 무렵에 수습이 안되는 걸 보면서 안타까웠던 적이 가끔 있었다. 물론 처음에 뿌려놓은 떡밥 회수까지 싹 다 하고 깔끔하게 끝나는 작품도 있지만, 개연성 어디갔냐고 안타까워하게 만드는 작품도 있다. 후자가 되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왜?"를 물으면서 쉽지는 않겠지만 인과관계를 탄탄하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컨대, 주인공을 항상 더 힘들게 해야 한다. 절대 봐주지 말자. 나쁜 일이 일어날 만하면, 일어나게 하자. 주인공이 상상한 최악보다도 더 나쁘게 만들자. 한마디로, 작가는 끊임없이 주인공의 발목을 붙잡을 의무가 있음을 잊지 말자.

이건 사실 작법보다는 내용 자체가 와닿아서 옮겨 적은 부분이었다. 주인공도 몰랐던 깊숙한 내면의 힘을 최대한 끌어내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 작가는 주인공을 봐주면 안된다는 내용을 읽으면서, 나도 주인공이긴 한가보다...하면서 위로 아닌 위로를 받았다. 이야기를 쓰게 되면 내 주인공도 너무 봐주지 말고 필요하면 가차없이 굴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책을 다 읽고 나니까 내가 이야기를 쓰려고 다짐한 후에 왜 막막했는지, 어디에서 막혔는지를 알 수 있었다. 물론 진짜 도움이 되려면 읽는 걸로 끝내지 않고 적용을 해야겠지만, 적어도 쓰기 전에 큰 방향을 잡아준 느낌이다. "왜?"와 "그래서?"라는 질문을 아끼지 않으면서 인과관계가 탄탄한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주인공이 외적 목표를 달성하도록, 그리고 내적 변화가 뚜렷하게 보이도록 잘 궁리해봐야겠다. 언젠가 아이디어를 한 편의 이야기로 완성하고 싶은 사람들이 읽으면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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