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독일을 처음 접한 건 아이들 어렸을 때 프랑크푸르트와 뮌헨 가족여행이었고 카셀도큐멘타에 출장갔을 때와 팬데믹이 시작되기 직전 파리에서 공부중인 딸과 함께 베를린을 여행한 경험 뿐이다. 대개의 여행자들이 그렇듯 그저 일정에 쫒겨 관광지 위주로 다녔기에 독일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아는 만큼 보인다고 독일을 세 번씩 다녀왔다는 이유로 독일과 관련된 책이나 다큐멘터리는 이후에 자주 눈에 들어왔다. 그러던 중 마치 어린시절 명랑만화 주인공 포스의 표지와 <명랑인 이방인> 이라는 책제목이 확 시선을 잡아당겼다. 우선 목차부터 주욱 훑어보는데 궁금한 건 절대 못 찾는 나의 호기심을 마구 마구 유발시켰고 급기야 작가에게 급 빙의(?)되어 단숨에 책을 독파해버리고야 말았다. 너무 너무 문장이 맛깔스럽고 센스가 넘친다. 그러면서도 이방인의 예리한 눈으로 독일 사회를 관찰하고 있으며 삶에 대한 초긍정 에너지가 느껴져 그야말로 명랑해질 수 있는 책이다.
본인의 의지로 결정한 독일행이 아닌 상황에서 남편과 아웅다웅 정착해가는 과정들이 시트콤처럼 그려진다. 프랑스 유학생인 딸에게 전해들은 집구하기, 통장개설하기 등등 돈만 있으면 누구나 쉽게 처리할 수 있는 우리와는 너무 다른 프랑스적 상황이 독일에서도 비슷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젊은 부부가 서로를 원망하며 “각자의 입을 냉동실에 보관했어야만 했다”는 대목에서 나는 강가희 작가의 유머와 센스에 점점 빠져들기 시작했다. 방송작가 출신다운 문장력은 물론, 센스와 통찰력에 책장을 넘기는 동안 공감과 감동을 거듭하게 되었다. 이방인으로서 바라본 독일의 사람과 제도들을 솔직담백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독일을 다 아는 것처럼 단정적으로 말하거나 편견을 심어주지 않고 있다. 아 여기도 우리와 이러저러한 면은 다르고 간혹 좀 이해안되고 이상하기 까지 하지만 결국 사람이 사는 곳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런 공감을 이끌어내는 작가의 글쓰기 내공은 아무에게나 나올 수가 없다.
경단녀(개인적으로 여성의 가정에서의 역할을 폄하하는 단어라 싫어하지만) 생활동안 자신이 놓여진 환경속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으려 애쓰며 이렇게 독일살이 에세이까지 낸 부분도 같은 여성으로서 존경한다. 부뚜막에 소금도 집어넣어야 짜듯이 이방인 생활 5년을 기록으로 남겨 책까지 내는 것 또한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원래 스포일러를 싫어해 책의 본문을 언급하는 것을 꺼리지만 문장이 주옥같고 사고가 신선해서 책내용을 약간은 이야기하고 싶다. “너 때문이야, 너 덕분이야가 아닌 나 때문에, 나 덕분인 삶을 기록하자”는 문장은 내게 뭔가 머리가 열리는 느낌을 주었다. 갱년기를 지나면서 자존감이 바닥을 찍는 가운데 책을 읽음으로써 유일한 돌파구를 찾고 있던 내게 작가의 말이 무척 위로가 되었다. ‘부럽다’ 는 말을 쓰지 않고 타인의 삶을 동경하거나 선망하지 않고 오롯이 나에 집중하며 안분지족하는 독일인들의 삶의 자세를 관찰해낸 작가의 통찰력에도 깊은 공감을 한다.
일상에서 인종 차별을 당하기 일쑤지만 독일 친구로부터 위로받은 이야기도 살짝 오지라퍼로서 같이 흥분했고 절도범이 될 뻔한 작가 부부의 사연을 맘 졸이며 읽어 내려갈 때 나도 모르게 소심하고 귀여운 이 배려심깊은 사람들에게 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한편 ‘케밥집 주인이 커다란 고깃덩어리를 쓱싹쓱싹 잘라내듯’ 이라는 재미지면서도 적확한 상황 표현은 또 어떻고!
게다가 절약정신이 투철하고 명품을 달가워하지 않는 독일의 사회적 시선을 보면서 한국에서의 소비패턴을 돌아보기도 하고 스스로 괜찮은 사람이라는 자기 암시를 걸어가며 명랑하게 독일살이를 하는 모습도 보기 좋았다. 이런 마음은 아마도 유학생 딸을 둔 엄마이기 때문에 더 공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나의 가슴을 찡하게 한 대목은 ‘우리가 함께 한 시간 함께 할 시간’이었는데 엄마와 딸의 감정이 그대로 이입되었다. 엄마인 동시에 누군가의 딸인 내가 이제는 요양원에서 삶의 끝을 겨우 잡고 있는 우리 엄마를 떠올린다. 엄마와 경복궁 덕수궁 다니며 이것 저것 설명해주면 그렇게도 좋아하셨는데 그 시간이 언제까지 남아 있을 줄 알았는데....하는 마음과 유학생딸의 안내로 이곳 저곳 그저 따라만 다닐 때 무한한 대견함이 공존하는 것처럼.
참나 강가희 작가 이양반 사람을 웃겼다 울렸다....너무한 거 아냐! 거기다 책은 왜이렇게 빨리 끝나버리는 건지...한참 재미있게 푹 빠졌는데 이내 마지막 장이 아니던가! ㅎ ㅎ
우리나라 독서시장에는 참으로 많은 힐링팔이 책들이 많다. 특히나 나라가 무슨 소림사도 아니고 승려들이 낸 힐링책들이 혹세무민하고 있는 현실과 ‘힐링’이라는 이름으로 독자를 기만하는 책들, 나 이렇게 성공했다 하며 자랑하는 책들을 경멸하는 독서인으로서 강가희 작가의 <명랑한 이방인>이야말로 생활밀착형 힐링 책의 반열로 올리고 싶은 맘이다. 작가만의 따뜻한 시선과 통찰이 담긴 에세이인데 무려 심지어 엄청 재밌다. 막 어록을 따라하고 싶어질만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