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새로운 꼰대의 대명사 586 세대로 조롱받지만 그 어떤 세대보다 격동의 현대사를 겪으며 정의롭게 살려고 애썼고 남녀차별에 저항하며 여성으로서의 권리를 찾고자 했던 원조 페미니즘 세대에게 <위민 투 드라이브>는 실로 간만에 만난 가슴 벅찬 에세이였다.
비록 세대, 인종, 종교는 다르지만 본인의 의지로 세상의 편견과 싸워나간 마날 알 샤리프의 이 자전적 에세이를 읽으며 때로는 같이 분노하고 때로는 같이 공감하다보니 어느새 마지막 장에 이르렀다. 긴박한 스토리 전개는 마치 흥미진진한 영화를 보는 듯 했고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궁극의 메시지는 거창한 구호를 외치진 않았음에도 자연스럽게 독자들에게 전달되었다.
현대를 사는 대부분의 여성들에게 너무나 당연한 ‘운전권’ 이 신변의 위협을 당할 정도로 본인의 희생을 감수하며 쟁취해야 하는 것이라니 그 사실 자체가 충격이었다. 게다가 그동안 내가 알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는 중동의 부자나라이며 대학교육도 무상이어서 아주 살기 좋은 나라일 거라는 정도였는데 마날의 책을 통해 그 부자나라가 여성에게는 아직도 종교적 이유 혹은 사회 관습을 들어가며 봉건적 의무를 강요하고 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수백만명의 여왕’이라는 미명하에 여성들은 남성이나 국가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 하지만 사우디아라비아에서의 이슬람 율법은 여성을 억압하고 남성에게 종속되어야 하는 존재이며 남성 보호자의 동의없이는 어떤 주체적인 결정이나 행동을 할 수 없다고 한다. 공공장소는 물론 심지어 직장에서도 남성과 말을 섞어서는 안되고 온몸을 천에 가리고 생활해야 하는 여왕(?)의 생활이라니 인간의 기본권인 자유 따위는 여성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어린 여자아이에게 강행되는 무지막지한 할례는 법이 금지하고 있음에도 아직 사우디 사회 전반에서 벌어지는 잔혹한 전통이다. 두 발과 두 손을 가진 인간이 혼자 이동할 수 있는 권리가 없다는 것이 처음에는 이해가 안되었다. 너무나 당연해서 이 지구상의 그 어떤 여성이 이런 당연한 권리를 위해 싸웠다는 것 자체가 충격이었다. 하긴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투표권이 불과 백년전 여성들은 가지지 못했다는 것처럼 말이다.
어린 시절 가정교육의 영향으로 이슬람 원리주의자에 충실했던 마날이 현대적 교육을 받으면서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게 되는 과정들이 아주 솔직하게 묘사되어 더욱 공감을 준다. 그 중에서 대를 이어서도 행해지고 있는 가장의 폭력이 별다른 저항없이 받아들여지는 부분이 안타까웠다. 우리나라도 내가 어렸을때만 해도 ‘여자와 북어는 사흘에 한번 두들겨 패야 한다‘는 말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회자되고 심지어 동네 여기저기에서 매맞는 아내들이 도망 다니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마날같이 똑똑하고 주체적인 여성도 그 어머니 세대가 겪은 가정폭력을 그대로 겪는 부분에서 참으로 안타깝고 속상했다. 이슬람 나라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여성의 권리를 찾아주는 것이 아니라 가부장적이고 봉건적인 남성의 사고방식 개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정과 사회에 뿌리박혀 있는 이 억압은 국가나 법이 나서지 않으면 근절될 거 같지가 않아서 화가 났다.
마날의 주체적 투쟁은 오히려 같은 동료들의 왕따 대상이 되기도 했는데 어떤 약자나 소수자의 권리를 찾기 위한 투쟁에는 무엇보다 연대의 정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위민투드라이브>가 세상에 알려진 것도 이런 연대의 결과이다.요즘 우리 사회에 만연한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을 보면서 꼰대인 나는 걱정스러울 때가 많다. 모든 사람을 투쟁의 대상으로 타파의 대상으로 몰아가는 그들의 공격적인 태도는 80년대 원조 페미니스트인 나도 질리게 한다. 한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인권운동이 아니라 연대를 이끌어낼 수 있는 설득력으로 세상 누구라 해도 그 인권이 짓밟히는 일이 생긴다면 함께 연대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결국 나를 위하고 나의 딸, 아니 전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한다.
마날의 성장에세이를 덮으면서 20년 넘는 나의 장롱면허증을 떠올려보았다. 누군가에게 생명만큼 절실한 그 라이센스를 아무렇게 방치한 나란 인간을 반성해본다.